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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Oct 27. 2023

행복 채집

벌이 꿀을 채집하듯 하나씩 행복을 모은다.

행복하길 원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람마다 행복감을 느끼는 상황은 각양각색이다. 어린 딸이 건네는 작은 사탕 하나에도 가슴 벅찬 행복을 느끼지만 기다리던 월급날에도 우울해지는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맑은 날임에도 눈물이 나고,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에도 환히 미소 짓게 되는 일이 생긴다. 


어릴 적에는 목욕탕에 가기가 정말 싫었다. 지금이야 냉탕도 넓고 시설도 좋지만 그 어린 시절에 갔던 좁은 목욕탕에서 하는 목욕은 거의 형벌에 가까웠다. 김이 잔뜩 서린 갑갑한 공기로 인해 시원한 냉탕에서 장난이라도 칠라치면 어른들의 꾸지람에 눈치보기 일쑤였다. 목욕을 마치고 탕을 나올 적마다 온몸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덥고 답답함에 시원한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것이 나의 큰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욕심은 언감생심이었다. 


나이가 들어 나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갈 일이 생겼다. 목욕 후에는 아들이랑 평상에 앉아 구운 달걀이랑 바나나 우유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서러움과 아쉬움을 아들의 모습에서 보상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아들이 계란과 바나나 우유에 행복이라는 감정 이입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 나에게 구운 달걀과 바나나 우유는 다른 차원의 행복감이 되었다. 


요즘은 혼자 목욕탕에 자주 들린다. 나이가 들면서 등 근육이 굳기 시작하고, 허리도 자유롭지 못해서다. 목욕은 근육과 피로를 푸는 데 최고다. 온탕에 온몸을 누이는 것으로 큰 행복감을 느낀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오면 바로 냉탕으로 다이빙한다. 모든 세상의 시원함이 내 몸을 완전히 감싼다. 목욕 후 나는 냉장고에 바나나 우유를 한 번 바라본다. 어린 아들과의 추억을 다시 되돌아본다. 더 이상 사 먹지 않는다. 그것으로 족하다. 추억만으로도 작은 행복감이 살아난다.  

석산은 뿌리의 힘만으로 꽃을 피운다. 

2023년 9월 18일 월요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비 개인 송해공원은 상쾌했다. 차문을 여는 순간 물소리와 벌레소리가 전원교향곡처럼 흘렀다. 더위 앞에 '늦'이라는 접두어가 붙을 만큼 이제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다. 산책 데크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쌓이고, 도토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숲 속에서 다람쥐는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석산은 산기슭 여기저기에 무리를 지어 땅속에서 꽃대만을 올리며 신비한 전설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2023년 9월 19일 화요일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다. 석산은 산기슭을 따라 여기저기 군락을 지어 피었다. 붉은 석산은 산책을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석산의 꽃은 신비롭다. 밤나무 밑에는 밤톨을 잃은 밤송이가 하얀 속을 드러내고 뒹굴고 있었다. 물까치 떼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우르르 몰려 날아다녔다. 뒤 따르던 몇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잠시 머물고는 무리를 따라 산을 넘었다.  


2023년 9월 20일 수요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송해공원은 차분히 내려앉았다. 높은 나무 사이로 숨은 꾀꼬리는 나와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호숫가에 앉아 사냥하던 물총새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라 달아났다. 참새와 박새는 떼를 지어 나무사이를 시끄럽게 날아다녔다. 흰뺨검둥오리들은 옥연지의 주인 행세라도 하려는 듯 엉덩이를 흔들며 둑길을 따라 돌아다녔다. 

한 무리의 흰뺨검둥오리가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2023년 9월 21일 목요일

어제저녁부터 많은 비가 내렸다. 아침에 공원으로 가는 길에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는 우회전 차선에 어떤 차가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경적을 울렸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신호를 받아 차들이 지나가기 시작하면서 주차장 출입구에 출입금지 줄을 쳐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경적을 울린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그 차는 막힌 길을 우회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던 얌체 차량이었다.

옥연지는 많은 양의 물을 방류하고 있었다. 시냇물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쉼 없이 옥연지로 물을 흘려보냈다. 공원은 다소 한적했다. 맨발 걷기에 진심인 손님은 오늘도 맨땅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내린 비는 길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 속에는 조각난 세상이 내려앉았다. 낮게 흐르는 구름은 산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한가해진 산책길에는 오늘도 흰뺨검둥오리 무리가 엉덩이를 실룩실룩거리며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었다.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한참을 운전하는 데 전화가 왔다. 차량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선배 누님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야?"

"네! 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송해공원인데, 2 주차장으로 와"

"네! 송해공원에 오셨어요?" 

서둘러 송해공원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갑자기 등장한 손님을 맞으러 걸었다. 가는 길에 여성 한 분이 내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에이! 조금 빨리 오셨으면 좋은 광경을 봤을 텐데"라며 말을 걸어왔다. 어떤 광경인지 궁금해하는 나에게 그분은 "연잎 위에 오리들이 앉아 있었는데, 정말 예뻤어요!"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그 광경을 보았지만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의 행복감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 "아! 아쉽네요"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물레방아를 돌아 나왔다. 그때 백세정 벤치에서 선배 누님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프라이즈!"

선배님들의 응원 방문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계란까지 삶아 오셨다. 구름과 태양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갑자기 만들어진 옥연지 벤치 카페에 앉아 행복감에 젖었다. 혼자 만의 사색을 위한 산책보다 가끔 함께하는 산책이 더 행복할 때도 있다. 오늘 손님의 방문을 환영하듯 물총새가 새파란 몸을 뽐내며 우리 옆으로 날아갔다. 이 광경을 본 손님들의 눈이 반짝였다.   

밤송이 속의 작은 밤톨은 누군가에게 큰 행복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토끼 굴을 타고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다. 나는 도심의 긴 차량의 행렬을 따라 송해공원으로 빠져든다. 내가 도착한 송해공원은 신비로운 일상으로 가득 찬 신세계다. 다양한 꽃이 피고, 물고기가 헤엄치며, 새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짧은 시간이지만 온전히 나만을 위한 우주가 만들어지는 유토피아다. 


나는 송해공원에서 작은 행복을 하나씩 채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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