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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용 Oct 26. 2023

화란, 불행은 도망치려 할 때마다 이자가 붙는다  

양질의 필름누아르... 오히려 그래서 아쉽다

*영화 '화란' 감상평입니다. 매우 소량의 스포일러 주의.


한국에서 오랜만에 묵직한 필름누아르가 또 한 편 나왔다. 올해 10월 개봉한 김창훈 감독의 첫 장편영화 '화란'. 연출에서 상업적 색채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도 충분히 이야기가 흥미롭고 매끄러운 서사가 인상적이다.


그래서 더 아쉽다. 올해 개봉작만 놓고 봤을 때 이 정도로 몰입했던 한국영화가 있었나 싶어서다. 이쯤 되면 한국영화는 '(필름) 누아르'에 특화된 게 아닐까 생각까지 든다. (바꿔 말하면 충무로가 누아르 영화를 참 잘 만든다) 적어도 내 눈에는 '잘 만든 영화'임에도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물론 재밌는 영화가 된 배경에는 연기에 대한 '송중기의 진심'과 예상보다 영화에 잘 녹아든 '김형서(가수 BIBI)의 노력'이 있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밝혀졌지만 송중기는 충무로에 돌고 있던 화란의 시나리오를 보고 본인이 먼저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것도 개런티 없이)


당연히 영화를 홍보하는 시점에 주목받은 배우는 송중기와 김형서지만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 '연규' 역할을 맡은 홍사빈이다. 영화의 배경인 가상도시 '명안시'에서 조직의 중간보스를 맡고 있는 '치건(송중기)'과 연규의 의붓여동생 '하얀(김형서)'을 비롯해 연규의 어머니 '모경(박보경)', 아버지 '정덕(유성주)'까지 모두 연규가 절망의 심연으로 빠지는 과정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한 역할일 뿐이다.


극 중 연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불행하게도, 불행은 도망치려 할수록 이자가 붙는다. (물론 상대의 잘못이 크지만) 한 번의 성찰도 없이 폭행(상해) 합의금 300만 원에만 생각이 몰려 있는 연규가 결국 돈을 구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300만 원'이 계기가 돼 오히려 더 어두운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규가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떠나고 싶은 네덜란드. 그 네덜란드에 가기 위해 수집하는 인터넷 정보조차도 '정말 중요한 내용'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연규의 눈에는 '금액이 얼마나 필요한지'만 부각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치건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불법사채다)


연규의 의붓아버지 정덕이 매일 술에 절어 연규와 연규의 어머니를 폭행하는 원인도 '돈'이다. 그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린다. (극 중 연규의 의붓여동생 하얀의 대사로 미뤄볼 때 정덕은 연규의 모친과의 결혼이 두 번째가 아니다. 그는 연규의 모친을 만나기 전에도 여러 번 가정을 꾸린 경험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유년기부터 한 번도 정착하지 못한, 여러 가족의 형태를 경험해야 했던 하얀이 자신처럼 제대로 된 가정을 겪지 못한 연규에게 동질감을 느껴 친오빠처럼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연규(홍사빈)는 돈을 모아 명안시를 떠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 환경은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일부 관객은 연규의 언행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저 '올바른 길'로 '힘들게 노력'만 하면 적어도 현재보다는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본인이 자진해서 더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실제 연규는 극 중에서 불행에서 도망치려 할 때마다 더 큰 불행이 더해지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규라는 인물은 영화 시작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킨다. 연규는 자신을 괴롭혀 왔던(것으로 보이는) 동급생을 폭행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말이 폭행이지, 강도가 매우 높은 상해다. 폭행의 정도만 봐도 연규가 그간 얼마나 분노가 차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규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이 생각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겠지만 보다시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애초에 연규는 일반적인 가정교육의 부재로 '보통의 학생'들이 시도하는 '문제 해결 방법'을 익히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시퀀스만 놓고 보면 (과장된 표현이지만) 피하거나, 부숴버리거나 둘 중에 한 가지 선택만 할 수 있는 사고를 가진 인물. 그게 연규다.


연규의 보호자는 두 명이다. 내부(집)에서는 어머니 모경, 외부(집 밖)에서는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이 연규를 보호한다. 다만, 보호는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모경은 연규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교로 찾아와 피해학생 부모와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있지만 남편의 폭행으로부터 연규를 보호하진 못한다. 자신도 잠재적 피해자인 데다 그럴만한 힘(돈)도 없기 때문이다. 치건은 연규가 돈을 벌 수 있도록 조직에 가입시키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지만 본인의 입으로 "집안 문제는 개입할 수 없다"고 한계를 인정한다. 또, 자신의 보스로부터 연규를 보호하려는 과정에서도 강하게 본인의 의사를 타진하지 못한다. 결국 실질적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연규를 보호하려는 사람은 극 중에서 연규의 의붓여동생인 하얀 뿐이다. (영화가 끝날 때 연규와 함께 명안시를 떠나는 것도 하얀이다)

하얀(비비)은 아버지의 폭행으로부터 연규를 구하고, 나중에는 연규가 아버지를 죽이려 할 때도 저지하는 인물이다. 그 밖의 여러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연규를 구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적 시각으로) 오히려 인물(역할)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던 건 연규가 아닌 치건이다. 치건은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인물이다. 잔인할 수 있지만 감성적이고 배운 게 없지만 지적이다. 일 처리가 냉혹하지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연규와 함께 호수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신(scene)은 영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스크린 밖 세계'로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그 외 아무리 역할에 몰입하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송중기의 인텔리 한 비주얼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이기에 아직 송중기의 외모는 너무 부드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중기가 이번 영화를 위해 얼마나 치건이라는 캐릭터를 열심히 분석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후반 연규와의 격투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대사' 제외하면 대부분 (scene)에서 '치건'을 연기하기 위해 송중기가 들인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눈빛부터 고개를 움직이는 각도, 걸음걸이와 앉는 자세 등 캐릭터의 세밀한 행동까지 연구한 송중기의 연기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시나리오 자체도 마음에 들었겠지만,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암수살인'의 주지훈처럼 송중기도 연기인생에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갈증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건(송중기)은 모순적인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모순이 영화를 조금 더 세련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한국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한 번 더 강조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한국영화가 누아르 장르에서 호평을 받은 게 언제부터였을까. 화란의 제작사가 '사나이 픽처스'일 때부터 진한 누아르가 한 편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실제 결과물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마음 한편이 허전하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평론가나 영화제 반응을 제외하고 (네티즌을 포함한) 해외 관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한국영화 대부분이 누아르다. 일본에서는 한국영화 특유의 어두움을 부러워하는 관객도 있을 정도다. (실제 언더커버, 마약밀매, 부패경찰 등 한국영화에서 자주 활용했던 소재들을 총 동원한 일본의 누아르 영화가 한국처럼 특유의 재미를 선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만 놓고 보면 왜 누아르 장르가 아닐 때마다 '웃픈 영화'가 탄생할 확률이 높은지 원인을 알고 싶다. 상업적 요소가 자주 눈에 띄지 않았던 '화란'이 충분히 재밌는 영화로 기억되면서 이런 궁금증이 더 커졌다. 충무로(투자자)가 아직도 어설픈 코미디와 신파로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한 줄 소감 :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지성 없는 발버둥... 결국 해답은 폭력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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