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뮤지컬 그리고 영화 프랑켄슈타인
넷플릭스에 기예르모 델 토르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이 올라왔다.
연극과 뮤지컬을 통해 접했던 이야기가 어떻게 각색되었을지 궁금해 올라온 날 바로 재생버튼을 눌렀다.
감히 말하자면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완벽한 영화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슬펐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내 머릿속에 있는 프랑켄슈타인은 머리에 나사를 낀 우스꽝스럽고 어리숙한 모습이었다.
그 이미지를 깨준것은 연극이었다.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는 2014년도 박해수, 이율 배우의 연극 프랑켄슈타인을 CD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내가 본 게 15~16년도쯤이라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화면은 작았지만, 박해수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괴물의 고통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괴물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받지 못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작은 화면 속에서도 그의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가 고립과 절망을 말하며, 공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작년으로 벌써 10주년을 맞이했다.
연극을 본 후 뮤지컬은 언제 돌아오나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처음 본 날은 18년 여름이었다. 일단 이 극은 오버추이부터 넘버가 미쳤다.
내용을 모르는 채로 1막을 보자마자 인터미션 때 바로 어플을 켜서 다음 회차를 예매했을 정도였다.
극에서 괴물은 빅터의 친구인 처형당한 앙리로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이 너무 끔찍하고 사랑이라 좀 더 비극적이다. 결말도 괴물이 된 친구 앙리를 빅터가 사살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괴물은 자신과 같은 고독 속에 빅터를 남겨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를 한 셈이다.
2막까지 보고 나와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존재를 통해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생각하게 만든다.
음악과 노래는 감정을 폭발시키며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뮤지컬은 사랑과 우정, 선택과 책임이라는 고민을 더 깊게 남겼다.
당시 보자마자 집에 와서 술 마시면서 아무렇게나 적어둔 감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ㅎㅎㅎ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집에서 넷플릭스로 보았다.
영화는 빅터와 괴물을 오가며 각자의 입장을 보여준다.
내가 집중을 했던 것은 괴물의 시선이었는데 앞선 작품들과 같은 결로 괴물은 인간보다 인간적인 존재를 보여준다. 특히 숲 속에서 눈먼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그랬다.
빅터와 아버지의 관계가 그랬듯 빅터와 괴물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보다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오만함과 동시에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곧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괴물은 아버지의 폭력과 결핍,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는 오만함 속에서 태어난 존재처럼 느껴진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키워내는가, 인간이 자신을 신처럼 여기며 생명을 창조하려 할 때 발생하는 상처와 책임에 대해 델 토로는 괴물을 통해 관객에게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결말은 앞선 두 작품보다 희망적이다.
괴물과 빅터는 결국 서로를 마주하고, 용서하고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끝이 난다.
괴물은 비록 부서진 채로 살아가겠지만 이제 살아간다는 건 그에겐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자기 증명의 과정일 것이다. 영화는 아래 메시지를 끝으로 엔딩이 올라간다.
And thus the heart will break, yet brokenly live on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
이 작품이 명작인 이유는 어느 시대에 읽어도 통하는 보편적인 감정인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실존에 대한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더 좋았다. 삶에 대한 희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간은 끝이 없는 고독 속에 아무렇게나 찢기고 고통받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단지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기 위해 산다.
영화까지 보고 나서 원작 소설이 궁금해졌다.
이번 주에는 책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