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란히 있는 ‘저작권의 날’은 잊고 보통 ‘세계 책의 날’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단순히 책을 많이 읽자,는 날로 기억하기 쉽다. 하지만 책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작자가 있어야 하므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저작권’도 동등한 중요도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인식들은 좋은 문학작품들을 만나게 하는 믿음직스럽고 필수적인 안전장치가 된다.
저작권이라 하면 대중에게 알려진 작가나 작곡가 등 유명한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블로그도 운영하며 저작권은 나의 일상에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건축 블로그를 하며 내가 판매하는 건축자재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남들과 조금 다르게 썼다. 건축업계의 주류인 기존의 중년 남성들이 쓰는 딱딱한 설명보다는 나는 여자이므로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진정성 있는 글 덕분에 사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블로그 상단 노출에도 내 글이 먼저 올라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나와 비슷한 블로그 포스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글의 전체적 흐름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도 내가 쓴 문장과 매우 유사했다.
문장을 만들어낸 사람은 자신의 문장을 알 수 있다. 그 문장을 만들기 위해 글감들을 떠올리고 단어들을 적당한 위치에 배열시키고 몇 번의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포스팅을 발견했을 때 나의 얼굴근육들은 영화 속 불운의 창작자가 자신의 표절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처럼 일그러졌다. 원체 누구에게 태클 거는 것을 싫어하고 블로그라는 플랫폼 자체도 먼저 포스팅한 사람이 훌륭한 베끼기의 본보기가 되는 실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 동안(거의 매 순간) 책상 앞에 앉기 싫어하는 나와 싸워가며 생각과 씨름하고 눈을 혹사해 가며 완성한 글과 비슷한 글이 생겨나자 나는 포스팅에 대한 의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두 베끼는 세상인데 이런 ‘순전한 생각의 노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이런 상실감과 허무감 때문에 저작권법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가 새로운 생각을 발견하는 것. 이를 위해서 저작자는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 축적된 여러 가지 지식을 융합하고 해체하고 재배열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과정이 행복하고 기쁨의 시간으로 충만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무쇠가 뜨거운 열을 만나 녹아지는 인고의 시간에 가깝다. 그런 창작물을 슬쩍 가져다 쓰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물질적 도둑질보다 더 큰 상실과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요즘은 생성형 AI 덕분에 순수한 창작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허무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나 역시 대단한 작가는 아니지만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반갑지만은 아닌 일이다.
저작권법상 보호되는 ‘저작물’은 사람의 생각, 사상 또는 감정을 새롭게 표현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고 모방은 새로운 창조의 근원이 된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면 그에 기반하여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여기서 떠오르는 아이디어 자체는 저작물로 보호받는 ‘창작’이 아니다. 그 아이디어를 이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법상 보호되는 저작물이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에디슨이 되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디슨처럼 1200번의 실패를 겪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서 그친다. 하지만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창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공부해야 함은 기본이고 그 지식을 생각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뇌의 전구를 번쩍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본능의 엔트로피를 거슬러 수많은 자기 절제의 시간이 필요하다.
10권 분량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을 집필하고 폭삭 늙어버린 듯한 전후 사진 비교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작가의 인고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일군 저작권이 자녀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이 되기도 한다. 자녀는 부모의 숭고한 창작의 유산을 물려받아 평생 동안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저작자로서 물질적 유산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적 유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부심과 감격일까, 그것 역시 ‘창작’을 하는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저작권이 없다면 소위 말하는 이런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에 어떠한 작용을 이끌어내는 창작은 저작자 본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글자가 발명되고 세계가 급격히 발전한 이유 역시 ‘글의 힘’, 사람들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든 글의 힘이라 믿는다.
요즘에는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거기에 더해 글 쓰는 것이 멋지다,라는 ‘텍스트힙’ 열풍으로 온라인상으로 수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다양한 SNS, 글쓰기 플랫폼을 통해 매일 수많은 글과 정보가 쏟아진다. 정보가 너무나 많다 보니 그중에는 잘못된 정보도 있고, 누구나 가져다 쓰다 보니 원작자가 누군지도 불분명해지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잘못된 정보가 많이 퍼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글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슬쩍 바꾸어 쓰는 잘못된 글쓰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공신력 있는 전문가가 쓴 글이라든지, 누가 쓴 글을 인용했다는 ‘출처표시’를 제대로 한다면 정보의 진위여부를 잘 파악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것을 조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고 국민들의 우리 문학에 대한 자부심도 높아졌다. 경제적으로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만큼 문학에서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과 주의가 더 필요하다.
‘출처를 표시’하는 작은 습관은 저작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고 창작의 숭고한 노력을 귀하게 여기는 좋은 문화가 될 것이다.
이런 글쓰기 예의들이 지켜지고 저작권에 대한 배려가 존중받아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제2의 한강 작가 후보들은 대기번호를 받아 줄을 설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화가 많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온기가 살랑살랑 차 있는 사회가 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