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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Oct 24. 2022

우리는 생각보다 더 어른일지도 모른다

2013. 10. 11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Date : 2013.10.11

우리는 생각보다 

더 어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명기자님과 만나 카페에서 모처럼의 수다를 떨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결국에 3시간이 넘게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모든 수다는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모이게 되는 것 같다. ‘연애’나 ‘사랑’이라고 말하는 종류의 이야기로.


명기자님과 나는 좀처럼 연애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갖지 못했는데, 이번에 나눈 대화에서는 어느 정도 접점을 찾을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랑에 제 한 몸 불사르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우 열정이 넘쳐나는 여자라서 감성이고 욕망이고 일단 불구덩이에 던져 놓고 부와악~! 타오르곤 했다. 불 길속에 내가 타는 건지, 상대방이 타는 건지, 아니면 전부다 잿더미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분간조차 못 할 만큼 참으로 열정의 여인이었다. 나는.


명기자님도 그랬다. 그녀는 종영한 tvN의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 를 언급하며 자신도 주인공인 ‘열매’와 다르지 않았었다고 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열매는 누군가 좋아지면 일직선으로 밀고 나가는 솔직한 사람이다. 


애정하는 배우 ‘정유미’가 열연한 이 캐릭터는, 밀고 당기는 연애의 룰에 당기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로 나왔다. 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인 ‘석현’은 이런 열매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어내고 상처 입힌다. 무려 12년이라는 오랜 시간 연애를 하던 두 사람이 어긋날 때마다, 열매는 자신을 것을 다 뱉어 놓고 힘겨워 하고, 석현을 전부 다 꺼낼 수 없기에 괴로워했다. 


명기자님과 나는 드라마처럼 뜨거웠던 시절에 대해 즐겁게 나누며 공감했지만, 한 편으로 더 이상 우리 안에 그러한 열정의 분자들이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 하는 기분이 들어 이야기의 뒷맛은 조금 씁쓸했다. 


수다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남자친구와 함께 그 드라마를 처음부터 같이 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흥미 없다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녀석도, 일단 드라마가 시작하자 착착 달라붙는 대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옆에 앉아 같이 보게 됐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는 수작이었다. 서브플롯들이 빠짐없이 재밌게 진행되었고, 무엇보다 열매와 석현, 그리고 삼각관계의 주역인 ‘지훈’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중간에 그만 볼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었는데, 다름 아니라 33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너무나 열정적인 열매의 모습 때문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수영장에 일부러 빠지지를 않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이기적인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서 상대방을 곤욕스럽게 만드는 많은 행동들을 보는 것은 점점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드라마를 보며 특정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항의했다. 아니, 33살이라며. 지금 나도 안하는 행동을 33살이 한다고? 연애를 한 번도 안한 것도 아니고, 닳고 닳은 12년 동안의 연애도 해보고 다른 남자와도 여러 번 만나봤다는 여자가? 


내가 열매의 행동을 불편하게 느끼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열매의 제멋대로인 성격이 나와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데다가, 과거 내가 연애를 하며 저질렀던 수많은 과오들을 아주 장렬히 전시 해놓은 기분이 들어서일지 모른다. 작가가 시청자의 이런 공감대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면 아주 적확했다고 하고 싶다. 그만큼 나는 불편했지만.


며칠을 나눠서 보고, 드라마는 16회로 끝이 났다. 열매는 새로운 연애상대이자 자신만을 위하고 사랑해준 ‘지훈’이라는 남자를 버리고, 결국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온 ‘석현’을 선택했다. 조연으로 나왔던 열매의 친구들도 모두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는데, 열매만이 옛 남자와 남은 것이다. 


남자친구는 마지막화까지 같이 보고선 내게 재밌게 보았노라고 했고, 나도 재밌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엔딩을 보고 난 솔직한 기분은 명기자님과 수다를 떨었을 때처럼 뒷맛이 씁쓸했다. 드라마에서는 열매와 석현이 네버엔딩 행복할 것처럼 보여줬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성장하지 못한 연애는 언젠가 서로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니까.


여자는 옛 남자를 보내지 않으면 절대 성장 할 수 없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석현을 뒤로하고 지훈을 만난 열매는 스스로도 한 뼘 더 자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등학생일 때부터 33살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석현을 곁에 두고 살아온 열매의 열정적인 캐릭터가 이해도 갔다. 18살의 열매는 33살이 될 때까지 연애에 대한 자신의 나무에 물을 준 적이 없다. 자라지 못한 나무는 그 키 그대로 열매에게 작용했고, 제멋대로 날뛰는 열매의 애정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어린 여자에게 당돌한 솔직함이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조금 큰 여자에게 솔직함이란 때때로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정말 솔직하다.’라는 표현은 양 날의 검과도 같아서, 거짓이 없이 시원시원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무례하고 일방적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알 거 다 알 것 같은 다 큰 여자가 앞 뒤 분간 못하고 날 것의 감정을 끄집어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부담스럽다. 그게 연인일지라도.


석현은 열매를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이해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어디 흔한가. 우리는 보통 몸도 마음도 다 자란 상태로 상대방을 만난다. 내가 그에게 전부 다 맞출 수 없는 것처럼, 그도 나에게 전부 다 해줄 수 없다. 원래 여자란 모두 성격이 더럽고 싹수도 노란편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적당히 깎고 둥글게 예뻐지는 법을 알아가게 된다.


헌데, 그 길은 꼭 많이 아프다. 엄청 많이 울고, 속앓이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마셔보고,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도 느껴보며, 정말 많이 아프다. 그렇지만 딛고 걸어가는 것이다. 아픈 일을 뒤로 넘기고 걷다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아, 내가 좀 자랐구나.’하고.


그래서 나는 드라마 속의 열매가 많이 안타까웠다. 옛 남자는 과거로 딛고 걸어갔으면 좋았을 걸 왜 다시 백스텝을 하는 걸까하고. 두 사람의 연애가 서로 한 뼘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길게길게 살아갈 인생. 한 뼘만 자라서는 모자르지 않을까..


사실은 드라마를 보며 나도 생각했었다. 내 옛 남자에 대해서. 과연 내가 돌아간다면 나는 저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복할 자신이 있을까?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쪼개진 나무가 본드로 붙인다고 다시 붙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단어를 쓰며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는 있다. 누구나 가슴속에 잊지 못할 감정하나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얼마 전 읽은 ‘실내인간’이란 소설책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하고는 영원히 못 헤어져. 누굴 만나든 그저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쌓는 것뿐이지.’ 


안다. 알고 있다. 

정말 사랑했던 그 시절은 평생 동안 내 안에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그래도 좀 부정하자. 그만 좀 하자. 그런 아픈 사랑 타령. 

열병처럼 앓았던 시절을 예방접종 삼아서 이제 우리 좀 편안해지면 안 되는 걸까. 


내가 모를 때도 나는 자라고 있었고, 다 컸다고 생각하면 한참 어리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 시절의 소녀는 이미 없다는 사실 하나뿐.. 우리는 이 없어진 소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생각보다 더 어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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