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
회사생활을 20년 가까이했고, 세 군데의 회사를 거쳤으며, 사원부터 팀장까지 모든 직급을 하나씩 밟아왔기 때문에 다양한 눈높이로 여러 임원들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어떤 임원이 기억나냐'라고 했을 때 여러 임원 분들이 떠오르지만, 그중에서 '본받고 싶은 임원이 있었냐'라고 묻는다면 아주 극소수의 임원만 떠오르게 된다. 그분들은 성인군자까지는 아니었지만, 회사생활에 한해서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뭐가 달랐을까.
그분들은 앞으로 아래에 언급할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아래 요소를 모두 갖춘 분은 없었다. 그러나, 아래 요소 중에 몇 개라도 갖고 계시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던 분들이었던 듯하다.
그 몇 개라도 갖고 있으면서 조직원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분들을 기억하며, 일명 큰 회사에서 존경받는 임원은 어떤 요소들을 갖고 있는지 한번 말해보고 싶다.
첫 번째, 가장 먼저 언급한다고 해서 가장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래도 회사니까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요소는 "성과"이다.
조직의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이 일단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운이 좋아서 만들었던, 정말 엄청난 노력으로 만들었던, 여하튼 성과를 내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조직원들에게 성취감과 높은 자존감을 준다.
특히 여기서 얘기하는 성과 창출에는 임원 혼자 고군분투해서 얻어내는 성과는 드물고, 주로 조직원들을 통해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조직원들을 통해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임원으로서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진짜 훌륭한, 존경받을만한 임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조직원을 "좋은 아이디어 같다. 한번 해봐"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 또한 "그 일에는 이게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이 사람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거기 찾아가서 협의해 봐" 하면서 네트워크를 연결시켜 줄 수도 있고, 계속될 듯 말 듯한 일에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조직원에게 "다 온 거 같은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더 붙어서 해봐. 다른 일은 잠깐 뒷전으로 두고 하던 일 포기하지 말아 봐"라는 등의 물리적/정신적 가이드를 주었기 때문에 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조직원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고 공정해야 한다.
성과는 대부분 조직원들의 노력과 열정과 창의력에 의해서 나온다. 그런 조직원들의 성과들을 총망라하여 임원으로서 평가를 받는 것이다. 임원 본인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서, 인사평가 제도와 같은 이유로 조직원들에게는 "제도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이유로 확실한 평가와 보상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과는 본인이 빼먹고 조직원들에게는 만족할만한 평가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런 임원을 따르고 싶은 조직원은 없다.
공은 가로채고 과는 떠넘기는 리더라면 최악 중의 최악이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본인이 다 했다 하더라도, 분명 궂은일은 조직원들이 했을 것이기에, 공이 있다면 그것은 조직원들에게 돌리는 것이 훌륭한 리더이다. 그걸 조직원들에게 돌린다 해도, 결국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면서 그 임원에 대한 명망은 올라간다.
조직원들이 창출했거나, 임원 스스로 많은 역할을 했거나 뭐든 상관없다. 임원이라면 성과에 대한 좋은 평가와 많은 보상을 조직원들에게 해줘야 한다. 회사 생활에 '워라밸'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의 타고난 본성으로서의 '인정 욕구'를 만족시켜줘야 한다.
또한, 그 평가와 보상은 공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여러 이유로 합리적이지 않은 평가와 보상을 마주하곤 한다. 학연이 어떠니 지연이 어떠니 라인이 어떠니 하면서 그런 이유는 정말 입에 담기도 싫은 이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여주는 임원이라면 그것은 존경이 아니라, 혐오이다.
그런 이유까지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누군가 진급해야 해서, 누군가 계속 고과를 못 받아서, 심지어는 누군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누군가는 퇴사할 것 같아서 등등의 이유는 눈을 감아줘야 할 것도 같다. 그래서 눈을 감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존경받는 임원은 눈을 감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와, 정말 공정하다.' '이번에 그렇게 하실 줄을 몰랐는데..' '명확한 기준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네'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임원은 일견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결국 끝에 가서 진짜 존경받는 임원이 되는 것 같다.
세 번째, 자리를 만들어주는 임원은 인정받아야 한다.
아마 많은 회사들이 비슷한 인구구조를 갖고 있을 듯한데, 대부분 항아리 구조처럼 씨니어들이 가득한 조직일 것이다. 그 얘기는 팀장 같은 부서장의 자리는 한정적인데, 씨니어들은 많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짤리지 않는 한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조직원들이 많음을 뜻한다. 임원들은 더 이른 나이에 부서장이 되었고, 더 이른 나이에 임원까지 되었으면서 정작 씨니어 팀원들은 조직의 구조상 쉽게 부서장이 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임원들과 팀장들에게 용퇴를 바랄 수는 없기에 씨니어들은 답답한 마음을 가득 안고서 살아간다. 그중에 절반은 부서장이 되는 것을 포기한 사람도 있으며, 절반 정도는 언젠가 올 기회에 대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 절반 중에서도 부서장이 되는 사람은 30%가 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인구구조를 그대로 옮긴 듯한 조직의 항아리 구조에서, 부서장이 되는 것은 임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CEO의 눈에 들어서 부서장이 되는 것은 정말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 임원들이 밀어줘야 부서장이 되곤 한다. 아마 보통의 임원이라면, 부서장 자리가 갑자기 어떤 이유로던 공석이 되었을 경우에 씨니어 중에서 부서장을 만들곤 할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부서장이 된 씨니어는 고마워할 것이지만, 정말 놀라운 임원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주는 리더이다.
자신의 조직에서 새로운 부서를 하나 더 만들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해서 부서장 자리를 만들 수 없다면(그래서 성과 창출을 가장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른 조직의 부서장 자리가 비었을 때라도 얼른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부서장이 될만한 씨니어를 데리고 있으면 본인의 성과에 도움이 되기에, 자기 조직 하에서 부서장을 만들어준다는 명목으로 다른 곳에 보낼 생각을 안 한다. 그러나, 씨니어가 빠져서 힘들어지더라도 조직원에게 도움이 된다면 부서장이 얼른 될 수 있도록 재빨리 기회를 낚아채서 물고기를 안겨주는 임원. 그런 임원이 존경받을만하다.
네 번째는, 소속감을 주되 누군가에게는 날아오를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조직 간에 갈등이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 맞고 들어온 동생이 집에 가서 형을 찾듯이, 조직원들은 다른 조직과 갈등이 생긴다면 그 끝에 가서는 조직의 우두머리인 임원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임원은 우리 조직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참자. 그냥 우리가 하자'라는 식의 처신은 조직원들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
밖에서 짜증 나고 열받아도, 집으로 돌아와서 같이 싸워줄 내편이 있다면 조직에 대한 안정감은 올라간다. 예전에 모시던 분은 우리 쪽 조직원을 나무랐던 타 임원에게 "우리 과장이 무슨 잘못이 있다 그래요?! 제대로 알고 얘기하세요! 있다고 해도, 일을 잘하려고 해서 그런 건데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앞으로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사라집니다!"라고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은 나에게 그동안 모셨던 임원들 중에 가장 강한 임팩트로 남아 있다. 일을 너무 빡세게 시켜서, 항상 힘들게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모습에서 나는 그 조직에 속해 있음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한편, 소속감이라는 것을 "누구 새끼"라고 굳이 표현해 본다면,
"상무님/전무님 사람"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들게 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부서 이동'이다.
조직원이 본인의 커리어나 성취감을 위해 다른 부서로 옮기겠다고 했을 때, 옮기지 못하게 하는 임원들이 대부분이다.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여러 이유를 들면서 옮겨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한 해 두 해 맞이하다 보면 그 임원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뀌게 된다. "자기 편할라고 나를 안 옮겨주는 거야.. 자기 혼자 잘되고 싶은 거지.."와 같은 마음이 들면서 소속감도 사라지고, 임원에 대한 마지막 남은 Followship도 없어진다.
그러나, 조직이 힘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조직원의 비전과 욕심을 위해 쿨하게 옮기게 해주는 임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모시게 되면 진짜 잘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잘하는 친구들이 더 잘할 수 있고, 하이라이트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임원 입장에서 단기적으로는 성과에 차질이 생길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무조건 플러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담대함을 갖는 임원은 진짜 별로 없다. 그래서, 부서 이동을 하려고 할 때 임원들의 진가(眞價)가 나오는 것 같다. 그때의 진가를 확인하는 것은 앞으로 존경할 것인지, 그저 그런 임원으로 기억할 것인지가 판가름 나는 중요한 잣대 중의 하나이다.
5. 마지막은 '진심'이다.
성과를 창출하고, 평가와 보상이 명료하고, 자리를 만들어주고, 소속감을 주었는데도 굳이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요소는 진심이다. 임원들이라면 조직원을 아끼고 격려하고 성장시키려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매뉴얼대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와이프가 차를 박았다면,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어디 다친데 없어?'라는 첫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뉴얼처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래.. 그렇게 얘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 남편이 딴 데 가서는 '와이프가 운전을 너무 못해서 차 박아가지고 돈을 200만원 날렸어'라고 했다는 걸 안다면 그 와이프는 어떤 마음이 들까. (필력이 나빠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해서 많이 안타깝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매뉴얼대로 연기하는 사람은 결국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런 임원들은 결국 말 한마디 또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 본심이 드러나버리는 순간이 있다.
'뭐야.. 저번에 괜찮다더니, 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하는 거였어?'
'아니 저번에 OO과장한테는 잘했다 하더니, 여기서는 왜 OO과장이 못한 거라고 하냐..'
이런 상황들을 접하는 조직원들의 경험이 쌓이고 공유될수록, 그 임원에 대해 여태까지의 모든 행동이 부정당할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임원의 매뉴얼 같은 말과 행동에 기분이 좋아지지도 Cheer-up 되지도 않는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말을 틱틱하면서 어떻게 보면 매뉴얼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임원들이 있다. 그렇게 조직원들에게 실망을 주던 임원이 진심으로는 조직원들을 매우 생각하는 사람임을 깨닫는 상황들이 쌓이면 완전 다른 형태로 기억되게 된다.
조직원에게는 진심이어야 한다. 여러 부분에서 부족한 면이 있는 임원이라도 그 진심이 있다면 조직원들은 그것을 추억한다. 성과도, 평가도, 자리도 중요하고 또 그것들을 잘 보여주는 사람에게
'진심'이라는 것이 빠져있다면 '대단한' 사람은 될 수 있지만, 존경받는 사람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임원이라는 사람들은 다들 그래도 소위 ‘한 가닥’을 했기 때문에 임원까지 간 것이다. 나름 자기만의 무기가 확실히 있었기에 회사의 별이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임원이 되었다고 해서 어찌 욕심이 없겠는가. 올라갈수록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이 아마 커질 것이다. 그렇기에 당장 앞만 보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해할 수 있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원으로서의 존경받는 회사생활은 조직원으로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한참 다르다. '왕관의 무게'라는 말처럼, 임원에게는 왕관이라는 상당한 보상과 무게라는 기대와 부담이 있는 것이다.
회사생활도 아주 작은 시대이자 역사로 생각해 본다면,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는 사람은 존경받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맡기는 사람이 존경받을 텐데, 나약한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임원도 하나의 사람에 불과한데, 어떻게 완벽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세 군데의 회사생활에서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그래도 '저분이 어떤 분인지 경험을 통해 대충 이상으로 아는' 임원을 100명은 넘게 만났을 텐데, 정말 존경받을만한 임원은 2~3명이 될까 말까이다.
그래서 '존경'은 웬만해서는 정말 받아내기 어려운 단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