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를 보고 나서 느낀 점
저번 주는 독감에 심하게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사람 체온이 39도까지 올라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쓰러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회사도 당연히 가지 못했다. 5일 중 3일을 출근하지 않았는데도 기쁘기보다는 야근해도 좋으니 하루빨리 낫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한 주였다.
방 안에 갇혀 있어 심심했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하이큐>를 정주행하는 데 썼다. <하이큐>는 배구에서 가장 유명한 청춘 스포츠물이라 할 수 있다.(슬램덩크와 같은 장르라 보면 된다.) 나는 이러한 류의 만화들을 정말 좋아하는데, 아직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한계에 도전하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즐겁고 피가 끓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군대에서 다 봤던 애니메이션이지만, 다시 보니 처음 볼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눈길이 갔는데, 개인적으로 꼽은 하이큐 최고의 명대사는 다음과 같다.
승부가 두려워 피한다면 결국 지게 된다.
평소 연습 때, 혹은 시합 중반까지 잘만 성공시키던 고난이도 기술도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신 있게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어렵다는 건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큐에서 몇몇 선수들은 '여기서 실수하면 분위기가 넘어가지 않을까? 우선 안전하게 하자.'라며 현실에 타협해 버린다. 하지만 쉬운 공을 준다는 건 곧 상대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쉽게 1점을 내주고 만다. 그럴 때마다 각 팀의 주장 혹은 감독들이 하는 대사가 이거다. 자신의 실수로 경기를 지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것은 결국 경기를 지게 할 뿐이라는 것을 잘 표현한 대사인 것 같아 좋았다.
또 선수들이 경기에 지고 나서 화를 내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연습을 열심히 했으면 물론이고, 설사 열심히 하지 않았다 했더라도 경기에 지고 나면 으레 화가 나야 정상이다. 그래야 하는데... 요즘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승부욕이 아주 강했다. 초등학교 단원평가에서 70점을 받았다고 급식(짜장밥에 탕수육이었다.)을 안 먹기도 했고, 게임하다가 지면 친구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승부욕은 고등학교 때까지 쭉 이어져서, 수능을 기대만큼 보지 못하자 반수를 과감히 포기하고 재수를 선택하였다. 당시의 내 결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식하면 용감하다.'인 것 같다.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했고, 넘지 못할 벽을 만난 적도 없었기에 쉽게쉽게 결정했고, 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경험이 쌓이면서, 노력, 열정, 근성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벽을 마주했다고나 할까. 대학 진학 후 계속 경쟁에서 밀리다 보니 멘탈에 너무 큰 타격이 가해졌다. 그래서 결국 어느 순간부터 '어차피 쟤는 다른 세계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벽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전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살다 보니 이제는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도, 시험을 못 봐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무감각해도 되나?'라 생각될 정도로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 단원평가 70점 맞았다고 짜장밥도 거르던 과거의 소년은 어디 갔을까? 또 최근에는 알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도전을 주저하는 편협한 사람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초심을 찾아야 한다. 지거나 못하면 화를 내고,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던 예전의 내 모습을 다시 되찾아야겠다고, 하이큐를 보면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