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1)
"모든 일정에 우선하여 오전 11시까지 영어 환자 발표를 준비하도록"
교수님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본과 4학년 내과 실습을 돌던 와중이었다. 나는 완전히 아침 컨퍼런스 발표를 망쳐버렸고, 교수님은 그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듯했다.
'영어.. 발표.. 라니..?'
교수님은 어쩌면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능을 본 이후 6년 동안 단 한 번도 영어를 접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불안에 떨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도 입시를 위한 영어 공부만을 했었기 때문에 사실 한 번도 영어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또 망신을 당하겠구나. 두려움이 엄습한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급하게 다른 과 실습을 돌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다행히 영국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친구가 시간을 내어 영어 대본을 만들어 주었지만 나는 그걸 외울 시간이 부족했다.
" This.. eval.. uation.. show.. s.. that.. "
떠듬떠듬.. 단어 하나하나를 겨우겨우 나열해갔다.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처참한 영어 실력은 그 짧은 시간조차 지옥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고 어느덧 자포자기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차라리 교수님이 발표를 중단시켜주기를 바랐지만 교수님은 잔인하게도 끝까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았다.
"자네는 영어 학원 한 번 다녀본 적이 없나?"
발표가 끝난 후 교수님의 첫마디였다. 정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좀 많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 끝자락에서 교육을 받았던 나는 교수님의 말대로 영어 원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도 종합반 학원은 있었지만, 단어 암기나 독해 등 입시 위주의 학원이었고 회화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영어를 못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라고 뭐 못하고 싶어서 못하나?'
지금은 각 학교마다 원어민 선생님들이 있는 걸로 알지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영어 선생님들 조차 영어로 말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대학에 오고 나서야 조기 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가뜩이나 실습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던 나는 도무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교수님의 말대로 영어 학원이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몇 달 뒤면 국가고시가 눈앞에 있었다. 시험공부에만 집중하지 않으면 합격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영어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열등감은 가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