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다가
엄마는 종갓집 종부셨다.
1년에 5대 봉사를 모두 합해 열다섯 번이 넘는 제사를 지냈다.
엄마는 마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할 수 있는 열과 성을 다해 평생을 헌신하셨다.
특히 제사상에 올릴 물건 고르는 안목이 대단하셨는데, 제사 일주일 전부터 가장 신선한 생선과 고기를
주문해 말리고 손질하며 준비를 시작하셨다.
떡살을 불리고 약과와 유과를 말려 튀기고 조청까지 만들어 버무려 내는 엄마의 모습은 숭고하게까지
느껴졌다.
우리가 유과라도 몰래 집어 먹으려고 할 때
"제사 음식 조상님께 보이지 않고 먼저 먹으면 입술 부풀어진단다."는 엄마의 협박에 오금이 저려
마른침만 꼴깍 삼키곤 했다.
친구들은 김이 폴폴 나는 떡이나 고소한 기름냄새나는 전이나 과자를 많이 먹을 수 있겠다며 부러워했지만,
우리 4남매는 배부르게 먹어본 기억이 없다.
제사를 위한 엄마의 꼼꼼한 준비와 정성은 문중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제사 음식을 담는 방짜유기를 반짝반짝 거울같이 빛나도록 닦아내는 솜씨는 최고였다.
먼저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기왓장을 부수어 둔다. 곱게 빻은 기왓장 가루와 잿가루를 섞은 뒤 짚을 돌돌 말아 적당히 물로 적신 다음 섞어 둔 가루를 콕 찍어 묻혀 오래도록 문질러 광을 내었다.
방짜 유기 장인이 금방 만들어 낸것처럼 반들반들한 제기는 우아한 자태로 제사상에 올랐다.
선이 고운 얼굴에 작은 체구가 어울리지 않게 엄마는 음식 손이 엄청 크셨다.
떡쌀은 넉넉하게 담그고 기름에 지져낼 전거리도 넘치게 다듬고 씻어 준비했다.
약과를 튀겨내고 유과를 말리고 튀겨 조청에 버무린 뒤 튀밥에 묻혀 내는 일도 많을 텐데 누룩을 직접 만들어 막걸리를 발효시켜 걸러서 제사술로 썼다. 그때는 그랬다.
커다란 무쇠 가마솥이 걸려 있던 재래식 부엌을 엄마는 며칠씩이나 종종걸음으로 들락거렸다.
문중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했다.
"우리 종부 정말 잘한데이."
"부지런하고 손끝 야물고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라."
"종부만 한 사람이 없다."
"우리 손부 고생 많다."
엄마는 문중 사람들의 칭찬에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참아냈던것 같다.
조상님을 잘 모시는것이 내새끼들 복받는 일이라고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나는 도덕 교과서 같은 엄마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제삿날이 너무 싫었다.
엄마 혼자 고생하는 것도 싫었지만 맏이라는 이유로 엄마를 도와 심부름과 뒷설거지를 해야만 하는 것도
싫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을 핑계로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 있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러 문중에서 수십 명의 제관이 오면 방이 좁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 날은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몹시 불편했다.
어린 마음에 우리가 먹을 것도 넉넉지 않은데 문중과 이웃들에게 제사 음식을 나눠 주는 것도 아까웠다.
아껴 두었다가 우리 가족들끼리 먹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종손이라는 명에를 뒤집어쓰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하늘같이 떠받드는 유교 사상의 모든 의식이 허례허식으로 느껴져 제사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한 달을 살아내기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종손이라고 따로 물려받은 유산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윗대 조상님들이 묻힌 선산뿐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과 말 못 할 고충을 아버지는 술로 달랬고 엄마는 콩가루 한 줌 섞어 넣은 밀가루 반죽을 해서
긴 홍두깨로 밀어 칼국수를 끓여 아버지와 술친구들의 술시중을 자주 자처하시면서 아버지를 위로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와 엄마를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라고 했다.
착하고 정직했던 아버지는 종손이라는 멍에를 내려놓고 좋아하는 술친구들도 세상에 두고 30년 전 돌아가셨다. 음력 9월 21일 "기일을 잘 지켜라."는 마지막 당부를 유언으로 남기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한결같이 제사를 지냈다. 문중의 제관들 발길이 뜸해져도 종부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가셨다. 아버지 살아 계실때에도 불순종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제사를 지내는 일에 불평과 불만의 말 한마디를 뱉지 않았다.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 법 없이 매사에 신중했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자식들에게도 늘 언행을 조심시켰다.
그런 엄마가 기억을 잃었다. 아니 기억을 도둑맞았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내던 엄마가 아프다. 대추씨같이 여물고 단단하던 엄마가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병에 걸렸다.
엄마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없어져 제삿날인지도 모를 때까지 우리 4남매는 산소의 풀을 베고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성묘를 해왔다.
작년 가을이었다.
달력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가 한마디 했다.
"오늘이 너 아부지 제삿날이데이."
음력 9월 21일, 우리 모두 잊고 있었던 그날을 엄마가 기억해 냈다.
엉켜버린 타래에서 툭 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기억이 제삿날이라니~ ~ ~
종부의 삶이 그토록 존엄한 건지, 고단한 기억을 거두려는 신의 마음이 치사한 건지 육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