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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여울 Mar 08. 2024

가보지 않은 길

 5년 전 추석이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친정집이 있는 마을 이장님이었다.

“너 엄마가 좀 이상한 것 같데이.” 하시는 이장님 말소리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가슴 위로 걱정이 더해졌다. 


어제 마을 회관에서 윷놀이하다가 자꾸 엄마가 윷을 던지려고 했단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더니만 삐져서 버럭 화를 내고는 집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전화기 속 이장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엄마한테 우리 집 고추를 따 달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 밭에 오지 않아서 데리러 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한테 언제 얘기했냐고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건망증이라고 보기엔 증세가 심한 것 같으니, 모시고 병원에 가보라는 통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지난 3년 동안 엄마를 전혀 챙기지 못했다. 명절에만 잠깐 얼굴을 보았을 뿐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 지냈다. 엄마의 변화를, 나는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으니 이번 기회에 검사를 받아보자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제부터라도 건강을 챙겨야겠다 싶어 큰 도시에 있는 뇌 전문 종합병원을 서둘러 예약했다. 


 며칠 후 엄마를 모시러 친정집에 갔다. 자세히 둘러보니 그제야 엉망이 된 집안 살림이 눈에 띄었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고 주방 찬장은 짝이 맞지 않은 반찬통과 뚜껑들이 산더미였다. 유통기한을 한참 넘긴 양념 병들이 굴러다녔다. 잔디를 깎지 않아 무성해진 마당에는 꽃과 과실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예 몰랐던 일은 아니다. 깔끔한 엄마도 나이가 드시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었다.

 

 구석구석 치우고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큰길에 나갔다가 엄마 친구분을 만났다.

 “안 그래도 만나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내 말 좀 들어 봐라. 나는 쌀을 빌려준 적이 없는데 엄마가 자꾸 쌀을 꿔 갔다고 갚으러 온다카이. 돈도 빌렸다면서 갖다 주러 와서 그런 적이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잊어버리고, 하여간 네 엄마가 이상타.”  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예약해 둔 병원에 입원해서 증상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모든 검사를 받았다. 

병실에서 지켜본 엄마는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을 물어도 엉뚱한 대답만 했다. 

퇴원하던 날에는 가방 속 금목걸이가 없어졌다며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신경질을 참지 못하는 아주 낯선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행동과 말로 반응을 하는 엄마를 달래듯 겨우 검사를 마쳤다.



 애초에 들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고 MRI로 찍은 엄마의 뇌 해마는 이미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져 있었다. 뇌동맥도 서너 군데 막혀 부풀어 올라 있는 알츠하이머 혈관성 치매였다. 이미 진행이 많이 되어 약물과 인지치료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했으며 담당의사는 엄마 혼자 일상생활이 어렵겠다고 가족들이 의논해서 돌봄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4남매가 한자리에 모였다. 동생들은 저마다 바쁘다. 막내는 해외에 살고 자영업 하는 여동생은 하루라도 가게 문을 닫으면 안 되는 처지인 데다 장남은 매일 출근하는 월급쟁이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숙인 채 눈치만 보고 있다가 남편이 먼저 말했다.

"다들 먹고살아야 되는데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장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 갈게."

"대신에 주말마다 번갈아가면서 돌봐주면 우리가 쉴 수 있으니 그렇게 해보자." 

동생들의 고맙다는 인사에도 대답을 못하고 속으로 맏이로 태어난 팔자 타령 했던 나의 인색한 마음과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당연히 내가 돌봄을 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우리 부부와 엄마,  알츠하이머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지난 5년은 엄마의 말과 행동을 뒤쫓느라 정신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상 순하고 착한 엄마가 억세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은 무척  아팠고 힘겨웠다. 엄마는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해도 길을 잃고 헤매었다. 매일 밤 소지품 보따리를 풀어 살피고 다시 싸매기를 반복했다.  

어느 저녁에는 집에 간다며 아이처럼 생떼를 썼다. 밥을 먹고도 언제 먹었느냐고 역정을 내거나 자꾸 밥을 먹겠다고 우격다짐 부렸다.  그럴 때면 엄마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강하게 저항하는 엄마의 얼굴은 무서웠다.

부처님을 닮아 곱고 자비로운 종부였던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악마의 모습으로 괴력을 내뿜는 엄마를 힘껏 찍어 누르고 있을 때면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보살핌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나는 마음만 앞선 시행착오를 무수히 거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야 했다. 치매 환자를 보통의 인성과 인격으로 이해해서는 금방 인내심의 바닥이 드러난다. 어린 나에게 한결같이 다정했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린 아이라 생각하면 백 번을 물어도 백 번을 웃으며 대답할 수 있도록 행동했다. 예전에 엄마가 어린 나에게 해주었듯이.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약 먹고 운동하는 습관도 도움이 되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진 엄마도 규칙을 반복하면 잘 따라 주었다. 일상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곳을 끊임없이 물었다. 엄마가 감정이나 감각까지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주치의 선생님 말씀을 새겼다.

 한 달에 한 번은 가까운 온천을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엄마의 등을 밀어주면 엄마는 함박꽃처럼 웃었다. 주말에는 미련 없이 엄마를 동생들에게 맡겼다. 

우리 4남매는 엄마 때문에 자주 만나고 더 많이 다투고 화해하며 울고 웃었다. 엄마의 치매는 우리의 노후 건강을 각별하게 챙기는 계기도 만들었다. 


첫 가족여행


 신기하게도 주말이 되면 엄마는 너무도 착한 엄마가 되어 동생들을 반겼다. 

 “힘들다고 죽는소리하더니, 엄마 멀쩡하구먼.”

 철없는 동생들의 농담에 화를 솎아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순번을 지켜 제 몫을 나누는 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적어도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엄마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통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변치 않는 사랑과 관심이 시간 속에서 치유의 효능을 발휘하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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