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달빛 은은한 밤 연인이 머무는 창가를 향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 세레나데(serenade).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흔히 소야곡(消夜曲)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레나데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7세 무렵, 슈베르트는 소프라노 여가수였던 테레제 그롭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가난한 작곡가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만다. 첫사랑의 아픔은 슈베르트 음악의 전반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근간이 된다. 일반적으로 세레나데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 속 구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어쩐지 감미로우면서도 애잔하게만 들린다.
슈베르트의 짧지만 강렬했던 생애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창작열(創作熱)과 가난이다. 31살에 요절한 그는 작곡가로 활동한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천여 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유실되거나 지금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 곡을 제외한 그의 작품은 교향곡 10편, 관현악곡 4편, 협주곡 1편, 피아노 소나타 22편, 미사곡 7편, 가곡은 무려 633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그의 창작열이 가난을 해소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부와 명예보다는 오로지 예술을 위해 창작에 열의를 불태웠던 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배고픔’이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는 동료 예술인이나 후원인을 만나면 며칠째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곤 했고 그들이 사주는 빵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거나 무대에 올리는 일에 소극적이었으며 때로는 자신 있게 들고 나선 창작곡을 출판인이나 후원자에게 보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어렵게 잡은 독주회 일정이 당시 최고 연주자로 평가받던 파가니니의 연주회와 겹치기도 하였으며, 유럽 동물사육제에 최초로 기린이 소개되어 이와 관련한 음악과 연극이 유행할 때 그의 작품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오랜 굶주림과 질병이 겹쳐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하다. 그의 이름과 음악은 그가 죽고 10년 후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슈만은 슈베르트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그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결국 슈베르트는 생전의 무수한 기회를 놓치고 사후에야 인정받은 불운한 아티스트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상상해본다. 만약 슈베르트가 노년까지 살면서 곡을 만들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어쩌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뛰어넘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세상에는 더욱 원숙하고 아름다운 그의 작품들이 흘러 넘쳤을지 모른다.
나아가 그가 예술상인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의 작품과 악보가 당대의 시장을 가득 메웠을 것이며 베토벤의 극찬을 받은 이 젊은 예술인의 후원을 자처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예술상인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더라도 그의 가치를 알아봐줄 수 있는 예술상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더라면, 분명 생전의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음악은 이곳에 풍려한 보배와 그보다 훨씬 귀한 희망을 묻었노라. 프란츠 슈베르트, 여기에 잠들다’
슈베르트의 묘비에 적혀있는 글귀이다. 그와 함께 묻힌 ‘희망’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숙연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술상인은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가능성을 지닌 타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계발하는 일까지도 자신의 사명이자 예술 활동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두 번 다시 슈베르트와 같은 비운의 아티스트는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 바리톤 정 경의 [예술상인] 제 13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