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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톤 정경 Aug 20. 2016

모차르트,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

- 上편


 클래식계의 영원한 신동이자 천재로 불리는 작곡가가 있다. 그의 작품이나 경력은 모를지언정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지금으로부터 230년을 거슬러 올라간 1786년, 오스트리아에서 한 오페라 작품이 초연되었다. 그 인기는 초연 당시부터 하늘을 찌를 듯했고 매번 정규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이 퇴장을 거부하고 객석에 남아 앙코르를 외치는 바람에 앙코르 연주가 본 공연보다 길어질 판이었다. 급기야는 국왕이 앙코르 제한령을 내려야 했던 이 걸작 오페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유럽 극장들에서 상연되고 있다.    

  

 작곡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대본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 하늘이 내려줄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던 모차르트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했다는 오페라 작품,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려 한다.      

     



[인간 모차르트]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다. 신동으로 불릴 만큼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모차르트는 만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으며 5세 때엔 작곡을 시작할 정도였다.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무려 626곡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 등 기악곡에서부터 오페라, 가곡 교회음악 등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 수많은 명곡을 쏟아내자 후대에선 그를 두고 ‘하늘이 내려준 음악 천재’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모차르트의 음악 스승이었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타고난 천재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모차르트의 업적은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그 노력이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모차르트는 타고난 노력파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재능으로만 치부하는 것에 서운했던 모차르트는 지인과 나눈 서신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19세기 당시의 기준에서도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사회성이 결여된 지나친 언행들로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의 나이 20대, 궁정음악가로 활동할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의 22배가 넘는 돈을 벌고 있음에도 급여와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서슴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쉽게 큰 재산을 탕진해버리곤 했다. 그를 아끼던 한 친구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모차르트가 지닌 음악적 재능이 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괴팍한 부분을 덮으면 녀석은 완벽한 존재가 될 겁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모차르트의 괴팍하고 독선적인 성격은 주변과 잦은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히 귀족들과의 갈등이 많았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융통성이 부족하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가득한 인물이었으며, 음악가들을 박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젊은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시종일관 반항적이었으며 사표를 던지고 궁전을 박차고 나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둘의 갈등은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서 모차르트에게 연주를 해 달라는 제의를 대주교가 임의로 취소해버리면서 절정에 이른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를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고는 결국 궁중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당시 음악가는 왕이나 귀족들에 고용되어 급료를 받아 생존해나가야 하는 매우 낮은 직급이었다. 하물며 대주교를 상대로 분통을 터뜨리며 싸운다는 것은 모차르트가 아닌 당시의 여타 음악가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모차르트와 대립 구도를 형성한 잘츠부르크의 콘테 콜로레도(Conte Colloredo) 대주교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각오를 단단히 굳힌 그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이 절 내려다보면서 홀대한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오만해집니다. 대주교가 저를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설혹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게 되더라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궁정음악가라는 평탄한 길로부터 내려온 모차르트는 음악의 도시 빈(Wien)으로 떠나 새로운 음악의 영역에 도전한다. 전업 작곡가, 즉 오늘날로 치자면 프리랜서 활동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어떻게 탄생했나]    


음악의 도시, 빈(Wien)


 모차르트가 빈에 자리를 잡고 작곡활동을 시작한 뒤 가장 열의를 쏟은 장르가 바로 오페라였다. 유년기부터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차르트는 12세 때 자신의 첫 오페라 작품인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궁정음악가로 일하면서 틈틈이 오페라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소규모 이벤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궁정에서 일하던 시절의 잘츠부르크는 풍요로운 작곡 및 음악 활동을 영위하기엔 그 환경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규모가 큰 작품을 상연하고 싶어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었고 그나마 희망을 끈을 붙잡고 있게 해 준 왕실 극장마저도 운영비용 문제로 폐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음악의 도시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빈은 잘츠부르크와는 비교조차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젊고 꿈 많은 모차르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들뜬 마음과는 달리 대규모 오페라를 제작하여 상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본의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대본들의 수준에 크게 실망한 모차르트는 베니스 출신의 유명 작가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본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수준 높게 표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제는 다 폰테가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으며,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마저 밀려 있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답답했던 모차르트는 수많은 작가들과 대본을 찾아 검토했지만 좌절을 거듭했다. 다음은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부분이다.     


“아버지, 저는 작품을 준비하면서 최소 100편 이상의 대본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대본이나 작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량을 고쳐야 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피가로의 결혼』대본작가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中 한 장면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카이로의 거위』, 『속아 넘어간 왕자』의 대본을 접하게 되지만 이내 제작을 포기하고 만다.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음악을 제대로 만들어 붙일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울한 2년이 흐르고 여전히 대본을 찾아 헤매던 모차르트는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가 쓴 희곡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한달음에 다 폰테에게 달려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 극본을 제작해달라고 의뢰를 맡긴다. 모차르트는 기나긴 기다림에 목마르고 지친 나머지 다 폰테가 대본을 작업하는 기간 동안 작성된 분량을 따라가며 작곡을 진행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바로 시기가 자신의 음악 활동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같은 각고의 노력과 기다림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피가로의 결혼』 원작 파헤치기] 


 『피가로의 결혼』 원작이 되는 희곡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피가로 3부작의 작가인 피에르 보마르셰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면 주인공인 피가로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원작인 희곡 「피가로의 결혼」원작자인 피에르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


 보마르셰는 프랑스의 극작가로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 「세비야의 이발사」, 「죄를 진 어머니」 등 피가로 3부작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희극과 정극을 오가며 특유의 센티멘털리즘(감상주의)을 드러냈다. 그는 극작가 외에도 수많은 경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작품들, 특히 피가로 3부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마르셰의 본명은 피에르 카롱으로, 1732년 시계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대 서민 출신답게 그는 2년의 정규 교육을 마치는 즉시 아버지의 시계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1세에는 시계추의 제어장치를 발명하였으며 이를 통해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기도 했다. 시계추 제어장치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되어 갔다. 시계공에서 궁정 감독관으로, 음악교사로, 첩보원으로, 출판업자로 차츰 변신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내가 가진 소유지의 이름인 ‘보마르셰’로 바꾸고 귀족이 되고자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곧바로 쓰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피가로 3부작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탄생 배경으로 인해 피가로 3부작에는 당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과 근대적 의식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끝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신분제의 장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귀족들의 세계와 그 장벽을 실감한 보마르셰는 그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귀족과 왕족들의 모순을 풍자했다. 극 중 주인공인 피가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삶과 입지를 투영한 등장인물로 보인다.                                                                       




● 모차르트,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下편에서는 [피가로의 결혼 줄거리], [왜 피가로의 결혼인가?], [극중인물 분석], [아리아 소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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