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이런 짐작을 하는데 '상대방이 이런 것들이힘들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할 거야, 그러니깐 내가 이해해 줘야지'
이 문장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내가 생각한 이해정도 뿐입니다. 이해의 감정이나 생각만이 내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과업이고 나머진 과도한 추측으로 상대방 생각에 대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해준다고 생각하는 순간 채무감이 생기고 이것들이 쌓일 수 있습니다. 축적을 한 뒤 해소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려면 해주는 척을 잘해줘야 합니다.
하나 나와 상대방의 위치를 완벽하게 교체하기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나의 위치를 상대방 가까이 가져가는 것 , 공감 수준일 겁니다. 책 속 비운의 주인공을 보며 눈물을 흘리거나 영상 속 누군가의 손을 다치는 순간 내손을 내빼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상대방과 바꿀 수 없겠지요. 내가 없다면 생각도 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으니깐요. 내 존재, 내 위치는 치환될 수도 교체될 수도 없습니다.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을 잘하면 실제로 공감과 이해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착각이지만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지요. 그 공감하는 대상은 여전히 짐작 속에 있어 틀릴 수도 있지만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이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척'을 잘해줄 수 있습니다. 해준다는 생각, 채무감도 덜할 수 있습니다.
말투, 몸짓, 자세등 수만 가지 요소들을 보며 우리는 타인과 대화(커뮤니케이션)를 합니다. 워딩을 바꾼다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는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다 바뀌지 지는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공손해지고 높다고 생각하면 거만해집니다. 그 위치가 물리적 높이가 되어도 그렇고 사회적 높낮이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고자세를 취하고 말만 상대방에게 공감한다고 하면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고자세로 설득하는 것을 보자면 상대방은 설득이 아니라 압박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기본 적으로 고자세를 취하면 워딩을 아무리 수정하던 그 말투, 자세 모든 것에서 티가 납니다. 상대방이 기민한 사람던 아니던 인간은 그 미묘한 지점을 잘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진화해 왔습니다
위치를 항상 낮추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방과 대립이 필요할 때, 강한 리더를 지향할 때 등 다양한 경우엔 자세나 위치를 높일 필요도 있습니다.
어쭙잖게 자신의 위치를 낮추면 상대방이 깔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위치는 낮추지만 튼튼한 기반을 갖추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안전한 곳에 있으니 자신 있게 의견을 나타낼 수도, 여유롭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