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그 노래
아직 말 못하는 아기와 하루 종일 집에 있노라면 정말 입에 곰팡이가 필 것 같다. 어디 입뿐인가.. 정신에도 거미줄이 처지는 듯하다.
그런 내게 조금이나마 세상을 즐기라며 남편은 라디오를 권했다.
인테리어에 몹시 신경 쓰는 난 기능보단 디자인에 중심을 두고 라디오를 하나 구입했다.
그리곤 그 이후로 하루 종일 라디오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라디오를 켜지 않으며 적막한 집안을 채울 방법이 없다.
라디오 듣기를 적극적으로 권했던 남편은 밤이 되면 라디오 좀 끄면 안될까? 하고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본다.
제 2의 출산이라는 젖몸살이 두 번째로 내게 찾아왔다. 젖을 끊을 때가 다가오나 싶다. 온몸의 근육은 다 날 떠나 날아가버릴 것 같고 고열과 두통에 앉아있기도 힘들다.
만들어 놓은 이유식은 바닥을 보이고, 하필 이 시점에 남편은 1년 중 가장 바쁜 일을 해결하는 중이라 일찍 퇴근하기 힘들단다.
결국 남편이 꾀를 내어 죽 전문점에 전화를 했나 보다.
집으로 전복죽과 함께 아기 이유식이 도착을 했다.
죽 전문가가 끓인 이유식이라니.
그동안 개발세발로 끓여준 이유식과는 농도부터가 전문스러웠다.
그런데 그 전문스러운 이유식을 거부한다.
뭘 주든 넙죽 넙죽 잘 받아먹는 녀석이 한 숟갈 맛을 보더니 LTE급 속도로 도리도리를 하며 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내비친다.
으흐흐흐 네 녀석,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을 거야?
내심 뿌듯함과 기쁨이 사르르 찾아오는데 그때 마침 라디오에서 한 사연이 소개됐다.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난 엄마랑 살 거야. 아주 오래 오래 평생 엄마랑만 살 거야. 엄마가 해주는 음식만 먹고 엄마랑만 잘 거야'라고 하더니 어느 날 결혼을 해 떠나더군요.
며느리와 함께 집을 방문한 아들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있길래 잘 지내느냐, 집안 일은 좀 도와주고 있느냐 등등 일상적인 질문과 함께 은근슬쩍 '넌 엄마랑만 살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제가 그랬었나요? 전혀요~ 전 지금 너무 행복해요. 제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아세요? 저 결혼하고 몸무게가 4킬로나 늘었다고요'하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얄미웠지만 오히려 저도 행복했어요.
둘이 잘 사는 모습 보니 참 좋아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하.. 역시 지금 이 녀석도 엄마가 해준 이유식만 먹겠다며 도리도리 하곤 있지만 언젠간 제 여자가 최고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 떠나겠지.
정확히 10년 전.
모교의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이 새삼 떠올랐다.
학술제 연습으로 한참 정신없던 저녁시간.
일명 장수생이었던 후배, 지금의 남편이란 사람이 가방 하나를 들고 내 옆으로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러곤 가방을 열어 내 눈 앞에 들이미는데 가방 안엔 한 백만 원쯤 되어 보이는 돈 뭉치가 들어있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과외하는 학생 성적을 원하는 만큼 올려주면 보너스로 100만 원은 주셔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진짜로 그 학생의 성적이 엄청나게 올랐다나...
무튼 덕분에 배고픈 대학 시절 원하는 것 실컷 먹고 재미 난 공연도 봤던 것 같다.
딸이라면 그 돈에서 일부는 뚝 떼어 엄마 아빠 선물도 좀 사주고 할 텐데.
아들이었던 남편은 그 돈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홀라당 쓰고도 모자라 또 돈을 벌어오겠다며 두 발로 열심히 뛰었더랬다.
우리 아들도 제 아빠 닮아 그럴 테지.
제 아빠처럼 스스로 벌어서 해주면 다행이게.
내 돈 뜯어가서 지 여자친구 고기 사주겠지.
고기 사주기만 하면 다행이게.
사주면서도 지가 불판 연기 다 맡으며 굽겠지.
제 여친은 손도 까딱 안 하고 받아만 먹겠지.
고기가 탔네 어쩌네 잔소리를 듣겠지.
아..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가 매일 가슴 쓸어내리며 노심초사 애지중지 아끼는 내 아들이 제 여자친구에게 노예처럼 당하겠지.
엄마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아들 녀석은 거실 구석에 앉아 열심히 박수를 친다.
신나게 박수 치는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당부한다.
아들! 절대 여친의 노예가 되어선 안돼!
여친이 투정 부리면 그냥 딱 버리고 돌아서는 거야!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녀석이 좋다며 웃는다.
좋다며 짝짜꿍 박수를 친다.
휴.. 결국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일찌감치 아들을 마음에서 내려놓거나,
아들이 정말 도도한 남자로 자라 주거나.
심란한 내 마음을 아는지 하필 이 시점에 라디오에서 묘한 노래가 선곡되어 나온다.
<사랑하는 어머님께> 노래 최성빈
어머님 용서하세요.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어 나의 머릿속엔 기억이 나의 가슴속의 심장이 그녀를 담아놓은 두눈이 한순간도 널 놓을 수 없게해 내게 준 당신의 커다란 어릴적 너무나 소중한 사랑마저도 이렇게 외면하게 해. 나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이기에...
저몰래 어머님이 그녀를 만나 심한 말 하신걸 알고 그녀에게 갔었죠.. 조그만 자취방에 그녀는 고열로 의식을 잃은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죠.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면서 전 정말 죽고 싶었죠. 이제껏 무책임한 저의 행동은 아무것도 해준것이 없기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를 이렇게 만든건 모두 나의 잘못이야 용서해. 너의 몸이 낫는데로 우리 멀리 떠나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어머님 용서 하세요. 그녀에겐 저밖에 없는데 그녈 버릴수는 없어요.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시 뵐 수 있는 날까지 건강하시기를..
달리는 기차안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서 당신이 흘린 눈물과 또한 너무 커다란 상처를 나의 어머님 당신께 남겨 드릴 수 밖에 없었던 이못난 내 자신을 돌이켜 봤죠. 그래요 내가 택한 판단이 옳지 않을지라도 내가 가는 이길에 축복없을지라도 내가 원한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후회하지 않을께요. 이런 날 용서 해요...
무슨 이런 천인공노할 노래가 다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