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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Nov 16. 2024

물보라 여인숙, 장미, 그리고 고골

별 쓸모없는 것들의 일기장


딸은 가끔 꽃 선물을 받아 들고 집에 돌아온다. 주로 장미 꽃다발인데 꽃을 자기 방에 두는 게 아니라 거실 TV 테이블에 올려두곤 한다. 꽃향기를 사랑하는 나는 재빨리 그걸 회수하여 <물보라 여인숙>으로 가져온다. <물보라 여인숙>은 내 서재 이름이다. 꽃을 담아야 하는 화병이 내겐 없다. 스타벅스 텀블러를 꽃병으로 사용한다. 장미 꽃다발을 풀어 물 담은 텀블러에 꽂는 것이다. 짙은 회색의 세이런 문양이 꽃과 이상하게 잘 어울린다. 딸이 며칠 전에 가져온 꽃다발은 아주 컸다. 텀블러 하나에 모두 담을 수 없었다. 다른 텀블러를 하나 더 가져와 두 개로 나눴다. 물보라 여인숙에 화사한 꽃병이 두 개나 들어온 셈이었다. 다음 날 저녁, 퇴근한 딸이 서재에 잠깐 들어왔다. 내게 뭔가를 물어보곤 나가려고 했다. 문득 꽃병을 봤다. 하나는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원래 딸의 것인데 뭐. 물이나 제대로 갈아주라고 했다.     


어제 아침에는 D 도서관까지 가야 했다. 거기에서 빌린 책 몇 권이 연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방에다 책을 넣고 나갈 준비를 했다. 한 권은 손에 들었다. 고골의 단편소설 <외투>가 수록된 책이었다. 집을 나섰을 때는 8시 28분. 집을 나서자, H 공원 쪽을 통과하는 코스가 마음에 들었다. 공원에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낙엽이 가득했다. 가을은 이제 막바지인 듯했다. 가을 햇살이 눈 부셨다. 공원의 숲과 나무 사이를 걸으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D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나는 고골의 단편 <외투>을 읽으며 걸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전날밤 읽다가 말았던 <외투>를 도서관에 도착하기 전에 끝까지 읽는다는 거였다. 고골은 처음 읽는 거였다. 고골의 명성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왔다고.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빼고 러시아 문학가들을 의미한다.      


어쨌든, 고골의 <외투>에서 많은 러시아 작가들이 나왔다고 하니, 늘 궁금하긴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D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찾았는데, 우연히 고골의 책이 옆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막판에 그걸 집어 든 거였다. 물보라 여인숙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넷플릭스 영화를 보다가 시간을 보냈다. 고골의 책은 빌려만 두고 <외투>는 읽지 못했다. 어느새 반납해야 할 기일이 된 거였다. 아, 아니었다. 사실 고골의 책은 반납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 22일이었다. 어제 꼭 반납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책들은 연체 중이었다. 그런데 다음 주 초반까지 가족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고골도 함께 반납하려고 들고 나선 참이었다. 전날밤 읽다가 만 곳부터 읽으면 도서관 도착 전에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골의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화사하게 시들어가면서도 향기로운 장미꽃 향기 같았다. 늦가을 오전 햇살과도 잘 어울렸다. 걸어가며 읽기에 적당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를 어쩌나! 도서관에 도착했는데, 아직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서 마저 읽고 반납할까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9시 30분까지는 집으로 귀환해야 했다. 요즘 아내의 심기가 불편하기에 될 수 있으면 그 시각에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일단 연체된 책들은 모두 도서 반납기에 투입했다. 고골은 반납하지 않았다. 다시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읽었다. 공원에 들어설 무렵 결말에 이르렀다. 다시 돌아가 반납할 수도 없고. 아, 난 뭐 하는 건지…?      


단편소설 <외투>는 고전답고 매력적이었다. 풍자와 비애와 유머가 있었다. 후반부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였는데, 작가 고골의 솜씨가 멋있었다.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오래 기억될 인물이었다. 고골이 마음에 들었다. <외투> 이외의 다른 작품은 애초에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책을 들고나갔다가 다시 들고 들어왔으니. 할 수 없이 부록에 있는 <고골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서 읽었다. 에혀, 다른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그냥 고골의 나머지 작품도 읽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내 책상 위에 떡 하고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작품 <죽은 혼>은 장편인데, 그것부터 잠깐 읽기로. 


한 지방 도시의 어떤 여관으로 작지만 멋지게 꾸민 반 지붕 달린 사륜마차가 들었다. 독신자. 그것도 퇴역 육군중사나 이등대위, 아니면 농노 백 명쯤은 거느리는 지주 같은 이른바 중류층 신사 양반들이 곧잘 몰고 다니는 마차이다. 마차에는 한 신사가 타고 있었다……


물보라 여인숙에는 장미꽃 향이 한창이다. 가을은 깊고 곧 겨울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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