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쓸모없는 것들의 일기장
요즘 평소와 다른 방식의 독서를 개발 중이다. 주 독서와 부 독서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주 독서는 1권 책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읽는 걸 의미한다. 물론 두 권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상이 되면 주 독서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딱 한 권을 선택하는 게 제일 좋고, 시간을 좀 더 내어 두 권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은 한정된 자원이기에, 이책 저책에 정신을 너무 분산시키면, 생활의 집중력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저 읽고 싶은 책을 두서없이 읽다가, 중간에 또 다른 책을 집어 들어 읽다가, 다시 원래 읽던 책으로 돌아가거나 하는 식으로 읽었다. 젊었을 때는 한 권에 몰입하여 찬찬히 다 읽은 뒤에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요즘은 이상하게 이책 저책 마구잡이로 읽다가 말다 하는 거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 독서와 부 독서로 나눠 읽는 실험을 시행하는 것이다. 1~2권을 주 독서 대상으로 삼고 매일 한 시간 이상 읽는다. 그것을 주 독서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그러면 부 독서란 무엇인가? 이건 매일 조금씩 야금야금 읽는 방식이다. 여러 권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매일 조금씩 권당 1~5쪽 내외 정도만 읽는다. 그 대신에 이것저것 마구 뒤섞어 읽으며, 바쁜 날은 건너뛰는 책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목록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 목록이 정해지면 그 책만 책상 위에 올린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 독서 : 1) 테스 (토마스 하디)
2) 맨스필드 파크 (제인 오스틴)
부 독서 : 1) 인포메이션 (제임스 글릭)
2)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3) 페어리 테일 (스티븐 킹)
4) 아웃 오브 아프리카 (카렌 블릭센)
5) 타오르는 화염 (존 스칼지)
6)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딥러닝 2 (사이토 고키)
뭐는 주가 되고 뭐는 부가 되는가?
책을 차별화하는 느낌이 좀 들기도 한다. 차별화 독서법이라고나 할까 ㅎㅎㅎ
어쨌든,
주 독서는 아침에 권당 1시간 이상 투입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발췌하여 타이핑한다. 외출할 때 들고나간다. 부 독서는 하루 중 아무 때나 책을 펼치고 잠깐 읽는 식이다. 10분 정도이다. 다시 읽는 책인 경우가 많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읽는다. (그런데 어떤 책은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런 건 도대체 무슨 현상일까? 노화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설마…)
원래 책을 한 권 통독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여태 읽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려보면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 따라서 좋은 책은 항상 다시 읽어야 한다. 뇌의 장기 기억 저장소에 저장되길 바라며.
새로운 이론이나 영역에 접근할 때에는 부 독서로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청춘 시절에서 멀어진 낡은 사람은, 새로운 걸 습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 독서를 통해 천천히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새로운 영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안면이나 익히자는 차원에서 매일 조금씩 흩어보는 것이다. 대충 전체를 흩어본 뒤에 해당 도서를 주 독서 목록으로 옮겨서 집중 탐구를 시작하면 이해력이 높아지고 쉽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나보코프의 에세이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독자의 문학적 감수성을 이토록 흔쾌하게 자극하고 일깨우는 작가의 열정을 그동안 왜 모르고 살아온 것인지, 후회스럽다. 물론 그의 대표작 롤리타를 10여 년 전에 인상 깊게 읽긴 읽었다. 하지만 어느 젊은 여자 작가에게 롤리타를 읽어보았냐고 물어본 게, 나보코프와 멀어진 계기라면 계기였다. 그 어느 젊은 여자 작가는 롤리타를 알고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역겹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명작이라고 알려진 작품일지라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12살 소녀와 중년 남자의 에로틱한 관계를 그토록 정밀하게 그렸으니, 변태스럽다는 평가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나보코프를 함부로 언급하는 일을 자제했고, 그런 자제심 탓인지 그만 그와 멀어져 버린 거였다.
하지만 최근에 그가 러시아 문학과 영미 문학에 관해 쓴 글들을 읽고서는 홀딱 반해버렸다. 그는 우리가 읽어야 하는 걸작들을 무게 잡고 소개하는 게 아니라,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부추기는 느낌이다. 뭔가 수다스러운 분위기도 엿보인다. 하지만 무척 친절하고 열정적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야간열차의 객차 안 풍경을 눈으로 그려보도록 하더니, 아예 그 객차 안에 탑승하도록 자꾸 옆구리를 찔러대는 느낌이다. 걸작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작품인지 애정을 가지라고 유쾌하게 등을 치는 느낌이다. 나보코프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을 전부 다시 읽어볼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못 읽은 나보코프의 소설도 하나하나 읽어볼 참이다.
스티븐 킹이 70세가 넘은 나이에 발표한 소설 페어리 테일을 읽으며 감탄하고 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과 서사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원숙해진 느낌이다. 젊은 시절에 스티븐 킹을 한 참 열심히 읽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주 모처의 구립도서관에서 어느 책을 빌릴 때 우연히 근처에 킹의 작품들이 있길래, 오랜만에 한번… 하는 심정으로 집어 온 책이다.
놀라운 것은 책의 장르가 공포물이 아니라 동화라는 것이다. 동화 속 왕자가 되는 이야기라니! 하지만 아직은 그 대목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동화가 아니라 스티븐 킹 특유의 공포 분위기로 다가가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경쾌한 맛도 있다. 넷플릭스 최신 영화를 포기하고 읽게 만든다! 지금은 부 독서 목록에 있지만, 책을 펼치면 시간을 상당히 잡아먹는다. 부 독서 목록 중 가장 열심히 탐독하고 있다.
청춘(?) 시절에 나는 농담으로 “퀸을 들으며 킹을 읽는다”하고 뻐기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킹을 읽을 때는 퀸 보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산한 음악이 더 잘 어울린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번 작품 페어리 테일을 읽는 시간에, 음악이 아예 필요 없다. 킹은 정말 잘 쓴다. 심층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소설 <녹색 고양이와 판도라 상자>의 2부는 색다른 분위기로, 약간 모험소설처럼 써보려고 마음먹었는데, 뭔가 꽉 막힌 느낌이다. 가볍게 출발하면 쉽게 나오는데, 거창하게 접근하면 글이 도통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좀 더 이리저리 굴리고 익혀야 할 것 같다. 1부는 좀 지루한 느낌이었다. 2부는 속도감이 있고 재미있고 흥겨운 작품으로 만들어야지, 한다. 마음만 그렇고 몸은 따로 놀고 있지만.
글 쓰다가 흥에 겨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신나게 막춤을 추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처음으로 로제에게 반했던 노래. 로제가 신인시절 복면가왕에 나와 부른 커버 곡이다.
출처 : 유튜브 [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