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Mar 26. 2024

오늘 할 채점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티끌 모아 채점 태산

2024. 3. 24.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얘들아, 문제집 어디 있지? 좀 가져와 볼래?"


한 멤버는 당당하게 문제집을 내밀었고, 다른 멤버는 다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 가 사건이 터졌군.

분명히 뭔가 있긴 있어.


남매는 매일 일정 분량의 문제집을 풀고 있다.

합기도 학원 이외에 다른 학원은 안 다니고 있는 대신 문제집을 사서 집에서 푼다.

처음엔 그 양반이 아이들 문제집 채점을 해주다가 일이 많은 곳으로 발령이 나서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집에서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티끌 모아 문제집 태산이 되었다.

잠깐(물론 솔직히 양심상 잠깐이라고 말하기는 좀 찔리는 면이 없잖아 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소홀히 하면 채점해야 할 장수가 꽤 쌓인다. (나보다는 확실히) 성실한 남매는 때가 되면 알아서 문제집을 풀었고, 그리고 그것을 간직해 버리기 일쑤였다. 풀었으면 엄마한테 넘기라니까 왜 고이 간직하는 걸까?

"얘들아, 문제집 풀고 나면 엄마한테 줘. 엄마가 하루 종일 그것만 신경 쓰고 살 수는 없으니까 엄마가 매번 못 챙길 수 있어. 그러다 깜빡하면 일주일 넘어가는 거 순식간이야.(확실히 경험상 그랬다) 알았지?"

자꾸 얘기를 해도 아이들인지라 듣고 깜빡하고 듣고 깜빡했고, 나도 다른 일에 정신 쓰고 있으면 문제집은 내 안중에 없을 때가 많다. 그러다가 그 양반이 기습 점검을 했을 때 나는 얼마나 쓰디쓴 과보를 받았던가.

잘못은 내게 있었으니 뭐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 양반은 매일 문제를 풀고 바로 채점을 하고 그날 곧장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라고 했지만(이건 너무나 이상적인 것 아닌가? 물론 내 생각에서만 그렇다. 결국 변명거리밖에 안 된다) 사람이 어디 그렇게 계획대로만 된다던가?

훈화말씀을 듣고 나면 나도 나름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기필코 그날 다 해치워버려야겠다고 마음먹어도 어쩌다 보면(?) 예상대로 되지 않은 날이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좀 많다... 이제와 자수해서 광명 찾기는 글렀지만 아무튼 문제집 채점이라는 굴레에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엔 이것도 재미있었다.

오래간만에 다시 초등학교 공부하는 것도 같고 아이들과 같이 하니까(어쩔 땐 아이들에게 배우니까, 잘난 척하면 엄마를 가르치는 아이들 보는 게 재미있어서) 현재 아이들의 학습 수준(?) 이런 걸 좀 잘 파악할 수 있었달까?

그리 신뢰성이 있다고 확신은 못하지만 가만히 보면 실수하는 곳에서 또 실수하고 착각하는 부분에서 또 착각하고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남매는 그런대로 잘해 나가고 있었는데 채점하는 일에 게을러졌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뭐.

이런 안일한 태도로 몇 번 나가다 보니 나중엔 이런 엄마의 특기(?)를 눈치채고 두 멤버 중 한 멤버가 슬슬 선로이탈을 시도했다. 두 멤버 중 누구인지는 그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절대 절대 밝힐 수가 없다.

나라고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알지만 얘가 어떻게 나가는지 보자, 언제까지 그러는지 보자, 이런 마음도 없잖아 있어서 그냥 모른 척하고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문제집 푸는 것도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하루 이틀 빼먹는다고 해서 세계 경제가 무너지거나 인류 평화가 깨지거나 하는 그런 어마무시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우리 집 어떤 멤버가 이런 나의 무사안일주의를   알면 펄쩍 뛰겠지만 말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다. 놀고 싶고 쉬고 싶고 하기 싫은 날이 있겠지. 그런 날은 눈도 감아 줄 수 있는 거지. 나는 너무 닦달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어떤 멤버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초등학생일 뿐인 남매를 공부에 지레 질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안 이쯤에서 그 양반은 거듭 강조한다. 한 멤버는 내일모레 곧 중학생이 된다고.

나도 어릴 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아니고 공부에만 매달리며 살았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무조건 공부만 해라,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면서 내가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고 목표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공부를 하게 됐다. 물론 잘했다는 건 아니다.

본인이 깨닫고 의지가 생긴다면 공부의 반은 성공한 거다.(라고 나만 생각한다.)


보자 보자 하니까 선로를 이탈한 멤버가 이젠 대놓고 일탈(?)을 만끽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엄마가 채점해야겠는데 문제집 좀 줄래?"

그 멤버는 당황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이들은 문제집을 풀 때 날짜를 기록한다.

한참 전의 날짜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안 한 지 좀 됐네. 엄마도 채점이 밀렸고."

나부터 제때 채점을 안 해줬으니 그 멤버만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양심이란 게 있으니까.

"엄마도 당장 귀찮아서 채점 미루면 금방 이렇게 밀려버리더라. 근데 그렇게 미루다 보면 정말 고치기 힘들어져.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면 힘도 들고. 밀린 걸 하루에 다 할 수도 없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밀린 건 매일 나눠서 조금씩 더 할게."

그 멤버가 대책안을 내놓았다.

"그래. 그게 좋겠다. 한두 장씩이라도 더 하면 밀린 걸 보충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동안 푹 쉰(?) 과보니까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그 멤버는 다시 예전처럼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마 그 멤버도 깨달았겠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그 말은, 오늘 풀 문제집  할당량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늘 할 채점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바로 그 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잿밥 완전 좋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