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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안 가져온 뉘 집 딸

그 딸 우리집에 있다

by 글임자
2025. 9. 29.

<사진 임자 = 글임자 >


"국어 노트 정리 하려고 했는데 안 가져왔네."

"너 다음 주에 시험 아니야?"

"맞아."

"근데 안 가져왔어?"

"응."

"아직 시간 있잖아"

"그래. 시간이 있긴 있지."

"주말에 하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까 안 가져왔어. 월요일에 가져와서 해야지. 할 수 없지 뭐."

"그래. 아직도 '3일씩이나' 남았으니까."


가만?

저 소리 전에도 몇 번 들은 것 같은데?

그때는 무슨 과목을 안 가져왔다고 했더라?


토요일 오전 내내 푹 쉬고, 오후에는 동생과 신나게 게임을 하시고, 난데없이 딸은 이실직고를 했다.

다가오는 수요일과 목요일에 태어나 처음으로 치르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딸은 결심 하나만은 단단히 한 듯 보였다. 그러나 마음먹는 일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전~혀 별개인 듯도 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학기 중에 종종 쪽지 시험 비슷한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영어 단어 시험 본다고 했는데."

"그래? 그럼 인간적으로 벼락치기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지. 근데 그 종이를 안 가져왔어."

"왜?"

"집에 가져와서 다음에 학교에 안 가져갈까 봐."

"뭐?"

"괜히 공부한다고 집에 가져와서 다음 수업에 안 가져가면 안 되잖아. 그래서 안 가져왔지."

"그럼 단어 공부는 어떻게 하려고?"

"어쩔 수 없지. 그 종이가 없는데."

"그래? 엄마라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그걸 미리 찍어 뒀다가 이렇게 안 가져온 날 집에서 그거라도 볼 것 같은데."

물론 나도 '생각은' 그렇다.

내가 지금 딸의 입장이라면 정말 그렇게 행동으로 옮길지 나도 장담 못 한다.

"그래도 시험 본다는데 공부하는 시늉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선생님에 대한 예의일 것 같은데. 진작에 선생님이 단어 시험 본다고 하셨으면 그래도 미리 좀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그날 아침에 가서 공부하면 돼."

"그래."

딸은 세상 태평해 보였다.

영어 단어 시험 그게 뭐라고 내가 더 안달이 났다.

평소에는 펑펑 놀았더라도 '적어도' 단어 쪽지 시험이 예고된 이상 하루 이틀 전에는 벼락치기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딸이 시험 보는 거지, 내가 시험 보는 거냐,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딸의 태도가 너무 안일한 건 아닌가도 싶었다.

그래도,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지금까지 학교 잘 다니고 있잖아. 꼬박꼬박 집에도 잘 들어오잖아. 학교 땡땡이를 치기를 해,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사고를 치기를 해? 뭐가 문제야? 영어 단어 시험 그거 준비 좀 안 하면 뭐 어때? 내가 아예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시험 당일날 아침에 학교 가서 하겠다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딸에게서 듣지 않은 것만도 어딘가 싶기도 했다.

그래,

점점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그저 몸만 건강해라. 아프지 말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렇게 원초적인 바람만으로 아이들이 커 나가기를 바란다며, (다소 속마음과는 살짝, 아니 아주 많이 다른) 그동안의 나의 바람만으로는 이제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일까? 누가 봐도 그렇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물론 건강하게 자라는 게 최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영어 단어 하나 더 맞았으면 좋긴 하겠다, 수학 문제 하나 더 맞았으면 좋긴 하겠다. 1점보다는 2점을 받으면 더더욱 좋긴 하겠다. 배드민턴 실기 시험이 있다니까 주말 내내 배드민턴 하고 밖에서 살다 왔으면 좋겠다. 리코더 실기 시험에는 독방 하나를 주고 사방에 달걀판이라도 붙여 주고 실컷 불어보라고 부추기고만 싶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도 옛날에 그렇게 못했으면서, 절대 그렇거 안 했으면서 아이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건 정말 내 욕심 같다.(고 정신을 차려본다.)


새벽 6시 반,

또 딸의 알람이 울렸다.

이번에도 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건 단지 울리는 '알람을 꺼버리기 위한' 기상이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음이 드러났다.

(어차피 국어 책도 없는 마당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무얼 한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딸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합격아. 그냥 이 알람 없애버리자. 자다가 깨면 더 피곤하잖아. 그냥 잠이나 푹 자자."


그나저나,

정말 내일 모레가 시험이라는데 오늘부터 국어 노트 정리를 시작하는 건...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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