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벼락치기 심은 데 벼락치기 난다.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by 글임자
2025. 9. 6.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어렸을 때는 양심상 2주 정도 전부터는 벼락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아빠라면 몰라도 우리 어머니께서? 엄마가 정말 벼락치기를 했단 말이야?"


당장 시험을 보는 사람은 딸인데 초등 아드님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하여튼, 호들갑스럽기는.


때는 바야흐로 생애 최초의 중간고사 이브,

비장한 마음가짐 하나만은 전교 1등감(이라고 나 혼자만 착각하는)인 딸이 갑자기 문제집을 들고 왔다.

"엄마, 채점 좀 해 줘."

학원은 아무 데도 안 다니는 대신 과목별로 문제집만 달랑 하나씩 풀고 있는 중이다.

"근데, 이거 시험 범위 맞긴 맞아?"

"아마도...? 맞겠지 뭐."

일단은, 당장 내일이 시험이니 살짝 약은 것 같긴 하지만 시험 범위만 쏙쏙 골라서 문제를 풀고 그걸 내가 채점해 주기로 했다.

채점을 끝내고 보니 놀랍게도 문제집 뒤쪽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비한 문제가 따로 또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학교 다닐 적에, 기원전 2,000년 경에도 그런 식의 문제집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건 최소한 중간고사 일주일 전에 다 끝내놨어야 되는 거 아닌가, 혼자만 생각했다.

"근데 합격아. 뒤에 중간고사 대비 문제가 있다. 이건 안 풀었네?"

"어? 그런 게 있었어?"

"있다."

"그래? 그럼 이제 풀면 되지 뭐."

"그래. 지금 풀면 되지 뭐. 안 푸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래도, 내일이 시험인데 벌써 푼단 말이야?

좀 아슬아슬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저 대비문제까지 풀 여유가 있을까나? 자그마치 다섯 과목씩이나 시험을 본다고 하던데?

"근데, 시험 전까지 다 풀 수 있을까?"

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무 상관도 없는 아들이 또 나서기 시작했다.

"엄마, 원래 공부는 벼락치기로 하는 거야. 그래야 생각도 더 잘 나거든."

대단한 일타 강사 나셨다.

위대한 족집게 나셨다.

당사자인 딸은 별 신경도 안 쓰는데 아들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미리부터 공부할 필요 없어. 미리 하면 다 잊어버려. 그러니까 이렇게 바로 시험 전날에 벼락치기를 하는 거야. 이게 얼마나 효과가 좋은데?"

아들은 '벼락치기 찬양'을 시작하셨다.

"맞아. 엄마도 왕년에 벼락치기 좀 했었지."

"엄마도 그랬어? 그 방법 진짜 좋지?"

"뭐, 그런대로. 근데 항상 후회가 되더라. 급하게 벼락치기하려니까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고 그렇더라고. 그래서 시험 끝나면 다음부터는 벼락치기 안 하고 미리 공부해야지 그렇게 다짐했는데 다음에도 또 그렇게 되더라."

"그랬어?"

"응. 공무원 시험도 날마다 벼락치기로 하고 맨날 놀아서 자꾸 떨어졌지 뭐. 근데 막판엔 거의 반년 미리 벼락치기하니까 붙긴 붙더라. 이래서 공부는 평소에 해 둬야 하는 거야."

"그래도 벼락치기가 진짜 쓸모가 있어."

아들의 벼락치기 사랑은 대단했다.

"그래. 너 예전에 알파벳 시험 볼 때도 맨날 아침에 급히 공부하고 가고 그랬잖아."

"그래도 잘했잖아."

"그 정도면 뭐 나쁘진 않지. 그래도 마음이 편하려면 미리 하는 게 뭐든 좋아. 닥쳐서 하려면 진짜 마음이 너무 급해지거든."

"아니야. 난 벼락치기할래. 나한텐 벼락치기가 잘 맞아."

"그러시든지요."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피는 못 속인다.'라고 한다지 아마?



사실 딸의 문제집 채점도 거의 벼락치기로 하는 중이다.

며칠 전에 큰맘 먹고 채점을 하려고 하는데 사회 답안지가 어디로 갔는지 당최 보이질 않았다.

온 집안을 다 뒤지다시피 했는데(벼락치기 찬양자 아드님까지 나서서 말이다.) 결국 찾지 못했다. 최소한 시험 일주일 전에 채점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렇게나 벼락치기 채점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명적이다.

결국 문제집 사이트에 들어가 답안지를 다운로드하여 채점을 했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수 십 년, 그때는 시험 벼락치기를 하고 지금은 자식의 문제집 채점을 벼락치기로 한다.

역시, 그 버릇 어디 안 간다.

벼락치기 심은 데, 벼락치기 나는 법이고, 왕년에 벼락치기로 시험 공부하던 학생은 어른이 되어 자식의 문제집 채점마저도 벼락치기로 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굳게 다짐해 본다.

다음엔 그때그때 채점해야지...(하지만 또 장담까지는 할 수 없다. 행동으로까지 옮길 수 있을지는 더더욱 자신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족집게도 아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