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때문에 고통받는가
만일 우리가 고통을 부자연스러운 것이나 경험해선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불행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의 희생자가 분명한 것이다.
나를 희생자로 만든 것은 정부, 교육제도,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문제가 있는 가정, 나와 다른 성, 쌀쌀맞은 이성친구일 수도 있다. 또는 비난의 화살을 안으로 돌릴 수도 있다.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스로를 질병이나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희생자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언가를 비난하고 자신을 희생자로 계속 생각한다면 끝없이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와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고통을 부자연스런 상태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거부하는 한 우리는 결코 고통의 원인을 뿌리뽑고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p.s: 2007년도 필사 노트(당시 출처를 밝혀 적지 않아 원문의 출처를 밝혀적지 못함.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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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처음 임용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썼던 노트에 적혀있던 글이다. 어제 이 노트 속의 글을 보면서 이 글을 필사하던 그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보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탓이오!”라는 네 글자로 줄일 수 있을 것 같구나.
내게 다가오는 예상치 못한 사건과 시험의 결과, 내 노력의 불만족스러운 성과에 대해서...정부와 교육제도, 또다른 동료에게 모든 원인과 책임을 돌린다면 내가 처한 상황을 개선할 필요성도, 방법도 더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만다. 그러고나면 이제 남은 것은 늘 세상을 탓하고 비난하면서 사회에서 도태되어가는 나 자신밖에 남지 않게 되겠지.
여기서 선생님이 말하는 “내 탓이오!”라는 말은,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는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받아들여 다음 번에 더 좋은 결과를 얻기위한, 더 많은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 누군가와 다툼이 있었다면 그와 나 사이에 서로를 할퀴는 상처가 된 사건은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해보고 나의 불찰에 대해 정직하게 성찰하고 용기있게 사과하거나 멀어져가는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심. 내가 뜻하지 않는 불만족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내 삶의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남 탓’으로 돌리면 당장의 문제는 손쉽게 덮어버리고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고 발전과 성장의 동기도 얻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내 탓’으로 생각하면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와 결과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 하루를 더 살고나면 나는 조금씩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내 탓이오!’는 당장은 입에 쓰지만, 길게 보면 달콤한 사탕과도 같은 마음가짐인 것이다.
모든 문제와 노력의 결과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내 능력 밖의 범주로 밀어내느냐에 따라 미래의 나는 ‘늘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부디, 여러분이 오늘의 달콤함에 취해 과거에 머무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늦더라도 조금씩. 자신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2024년 11월 29일 담임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