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릴스나 숏츠를 본다. 그 짧은 영상들을 보다 보면 알 수 없는 ‘기이함’이 밀려온다. 너무 기이해서 '대체 이 사람은 누구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콘텐츠를 만드는 걸까.'하며 피드 전체를 탐닉한다. 하지만 피드를 끝까지 봐도 이 알 수 없는 '기이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 크게 어긋나 있다는 듯한 불쾌한 낯섦이 밀려온다. 무언가 뒤틀려있다. 앞뒤 관계가 뒤바뀌어 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고, 과장되고, 과도하게 주목받는다. 무엇이 즐거운지, 무엇이 유익한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조차 모른 채.
자극적인 콘텐츠가 판을 친다는 말도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생산자들은 더 많은 ‘좋아요’와 ‘조회수’를 위해 과장되고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콘텐츠를 만들지만, 그 과정은 자기 파괴에 가까워지고 있다. 몇 만의 조회수와 수많은 댓글이 나를 지탱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나 자신이 없다. 역설적이다. 끊임없이 '나 좀 봐주세요'하고 외치지만 그 속에 진정한 의미의 '나'는 이미 없어진 뒤다.
우리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다. 우리는 스스로 보고, 듣고, 생산한다.
"정말 그게 좋아 보였던 걸까? 그런 것들이 왜 좋아 보였을까?"
성공을 과장하고, 부를 과시하고, 동정을 유도하고, 분란을 조장하고, 지나치게 상품화하고, 우월감을 과시하고, 하나의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재단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버전의 나’를 만들도록 압박하고, 소비를 통해 자아를 증명하도록 유도하고,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느끼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브랜드화하여 상품처럼 팔고, 일상적인 행복마저도 콘텐츠화하여 경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정말 좋아 보였던 걸까? 어쩌면 좋아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해야만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또 다른 자극을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 속에 갇혀 있다. 그 결과 모두가 자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다. 심지어는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조차도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꼭 알맹이가 있어야 해? 웃기면 됐잖아. 재밌었잖아. 돈이 벌리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모든 것이 웃기면 그만,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로 정당화되고, 순간적인 반응만이 유일한 가치 척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라진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품위’다.
자극을 쫓지 않고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도 당당히 존재할 수 있는 자세,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전해지는 울림. 이것이 진정한 품위가 아닐까. 품위는 단지 얌전함이나 절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품위란 나를 높이려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고, 과장을 더해 스스로를 왜곡하지 않으며, 조용히 침묵 속에서도 내면의 확고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품위 있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나 외부의 시선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외부의 자극적인 소음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과장되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일시적인 주목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희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고개를 들고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며, 그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닌, 더 깊은 침묵일지도 모른다. 품위를 잃어버린 시대. 모두가 외칠 때, 우리는 조용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