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족같이 모십니다
한문에 일가견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반면교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학교 교사들이 생각남.
아무튼 나에게 있어 반면교사는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반면교사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아주 어린시절(아마 말도 잘 못하던 유년기?)에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건 늘 집에 없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식당일에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던 그 나이에도 항상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대개 이런 부류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나 남자 어른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커진하고 하지만 보편적인 사례일 뿐.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집엔 늘 엄마와 외할머니 뿐이셨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할머니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너희 아버지는 죽어도 닮지 말라' 셨다.
기본적으로 아이가 있는 집에서도 뻑뻑 피워대는 담배는 기본이고 맨정신의 아버지 얼굴 보다는 술에 절어있어 인사불성인 된 모습만 영원히 각인되어, 묘한 상황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여담이지만 이 걸 읽는 자녀를 둔 유부남들은 꼭 명심하시길 바란다. 당신들도 어린시절의 안좋은 기억이 마치 백지에 혼자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못마냥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겠지만 어린 자녀들도 한 번 각인된 가정의 이상한 기류들은 성인이 되어도 뇌 속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튼 외할머니는 항상 '주머니에 딸랑딸랑 동전 소리가 날 때 집에 기어들어온다'고 우리 아버지를 회고하셨다.
실제로 그랬다. 기본적으로 용접일을 노가다 주 포지션으로 삼아 거의 평생을 그 일을 하려고 노력(...) 하셨던 우리 아버지인 지라 막노동이나 노가다를 나가면 운좋게 용접일이 걸렸을 때, 1번으로 지명되곤 하셨다.
용접일을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용역이라도 페이가 좀 쎄다. 아는 사람 알음알음으로 용접'만' 하게 될 경우 용역 일급에 비교도 되지 않는 돈을 받는다.
문제는 지금처럼 용역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예전, 거의 모든 일거리를 같이 일했던 현장 반장이나 소개-소개로 건너 같이 일을하던 시절에 한 달이고 반 년이고 지방으로 출장이 잦게 된다.
대부분 싸구려 여관방에 장기 투숙 방을 잡고 노동자들이 합숙하는 식으로 쭉 지내는게 관례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수 달 동안 벌었던 월급이나 주급을 절대 집에 들고 들어온 적이 없다.
아마도 아버지는 평생 엄마에게 월급봉투를 쥐어준 적이 없다고 봐야하나 그럴꺼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항상 아버지를 닮지 말라 성화셨다. 돌아가시는 그 날 까지. 크게는 아버지처럼 술과 담배를 하지 말라셨고 자잘하게는 여자에게 함부로 하지 말아라, 잠바 앞 지퍼 열고 다니지 말아라, 신발 꺾어신지 말아라, 어딜가도 예의를 갖춰라 등등 셀 수도 없다.
당연하게도 외할머니의 잔소리보다 피부에 와닿는 아버지의 모습들 덕분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닮기 싫어서 담배와 술을 일절 하지 않았다.
외가나 친가나 술을 잘 하는 줄 알았지 내가 어릴 땐.
다들 술을 끼고 살았응께.
하지만 외가나 친가 어르신들은 물론 2세들 역시 대개 술을 잘 못했고 그냥 마시다 보니 어느정도 마실 줄 알게 됐던 것. 아무튼 그럼 아버지의 (일반 노동직 보다 용접으로 더 많이 받게된)월급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단란주점의 아가씨들이나 술집의 사장님들 주머니로 호로록♡
아버지왈, 불쌍해서 현금을 주고 싶다 헛소리를 하시던데 그럴 때 마다 엄마는 '니 여편네랑 아들새끼는 불쌍하지 않냐?' 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 대체 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 까지 무슨 돈으로 날 키웠을까?
몇 푼 되지도 않는 식당 일이나 모텔 청소로 아마 나 군대가기 전까지 뒷바라지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성향은 대물림 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으니 엄마는 식당일 등을 전전하며 카드 돌려막기를 시전하셨다. 덕분에 으레 어린 시절에 갖고 싶었던 물건은 거의 단념하다 시피 했던 기억이다.
그래서 군에 가기 전에 여러 알바를 전전했고 학비 부담 때문에 막무가내로 학교를 그만 두었다. 엄마는 아직까지 내가 더 좋은 학교로 가려고 편입 준비를 했던거라 여기고 계시겠지만 내가 21살 즈음인가 참다 못한 아버지가 엄마에게 먼저 이혼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명의로 대출을 받아, 나 결혼할 때 집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허름한 빌라를 그 당시 시세로 3,800인가에 구입했던 것. 어머니 이름으로는 이미 대출 한도가 안나왔고 나는 당시 군입대 전, 뚜렷한 직장이 없는 알바생 신분이라 보증만 가능했다(이건 훗날 스노우볼이 되어 내 목을 옥죄게 되는데...).
엄마가 아버지 몰래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며 갑자기 눈이 돌아 먼저 이혼을 하자셨다. 그 길로 가출하듯 집을 나가시고 전국을 돌며 노가다로 생계 유지.
20여년간 고통받은 엄마에게 악귀처럼 달라붙어있던 아버지가 이제야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 기뻤기 때문이다.
그 뒤로 8년인가 뒤에 친할머니 부고 소식을 친척 누나에게 받고 장례식장에 갔는데 거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와의 이혼 후 생활력 강한 분을 만나, 여지껏 고생했던 것 이상의 호사를 누리며 살고 계셔, 나는 그 아저씨의 존재를 자연스레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친할머니 댁에서 8년만에 만난 아버지댁으로 들어가, 몇 년 같이 살게 되는데 여전히 술을 좋아하시고 동거하던 정신병자 아줌마도 있었다.
당시 나도 딱히 뾰족한 일거리가 없었을 뿐더러 가끔 나가던 노가다는 월세 내기가 영 빠듯했다.
어린시절에 내가 봤던 고주망태 아버지와 성인이 된 뒤 내가 본 고주망태 아버지는 나이만 자셨을 뿐, 달라진게 없었다.
LH에서 극빈곤층에게 선심쓰는 보증금 지원 사업을 알게되어 내가 신청해 드려 현재까지 그런식으로 살고 계신다. 나쁘지 않은 제도인건 분명하지만 나름 전세라서 계약기간마다 연장을 하거나 LH에게 받는 돈을 기피하는 집주인도 생겨나기 때문에 재계약시기엔 항상 긴장해야 한다.
당시 집주인님께서 집을 판다고 해, 아버지께 LH 보증금 중 500만원을 통장에 선입금해줬던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만에 술집에서 탕진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아버지댁에서 나왔다.
집주인과 부동산 업자 앞에서 내가 찾아가, 사정사정 할 때 민망해 하던 아버지의 그 꼬라지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 또 자질구레한 일이 꽤 있긴 했지. 아버지가 길에서 주운 남의 카드를 긁어 야밤에 경찰이 찾아온 일이나 동거하던 정신병자 아줌마를 병원에 보내버리고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여자랑 혼인신고를 하는 통에 기초생활 수급자 요건이 안되는 둥, 인생 참 대책없이 꼴리는 대로 사는구나 싶었다.
작년 즈음에 내 블로그에 우리 아버지를 기초생활 수급자로 만들려던 4년의 노력을 포스팅 했었고 이제야 그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이혼 절차가 마무리 되어 현재는 내가 만들어준 나랏돈 타먹으면서 흥겹게 살고 계시다.
그 직전에 젊은시절에 마셔댄 술 탓에 뇌졸중이 와, 병원비로 수십만원 깨지고(아악 내돈!) 요양보호사 신청도 엄마 조언으로 내가 다 알아서 해드렸다.
그 뒤로 특별한 돈벌이 없이 나라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세금으로 빠져나갈 겨를도 없이 생활비로 슉슉 쓰시는 걸 보고 내가 돈관리를 맡아서 해드렸는데 최근에 불같이 화를 내시며 당신이 하시겠다 쌍욕을 전화로 퍼부으시길래 '아직 정신은 멀쩡하구나' 라고 안도하며 이제는 알아서 하시라며 돈관리에서 손을 뗏다.
예전에 아버지께 문득 이런걸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이 젊은시절에 왜 그리 술에 절어 살았고 집에는 왜 안 들어왔으며 엄마를 왜 그렇게 미워했냐고.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냥 싫었단다. 살찌는 것도 싫었고 불같이 화내는 성격도 싫었고 그냥 다 싫었단다. 스트레스 풀데가 없어, 폭식과 나를 패는걸로 화를 푸셨던 우리 엄마였는데.
이혼 후 후회하는 말을 더 많이 들었지만 이 지점이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아버지를 내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정립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옛날 분들이 대개 그렇듯 우리 엄마나 아버지나 때 되니까 결혼하시고(중매) 나를 낳으셨던 것. 그 뒤로 여자 좋아하는 버릇을 못 고친 아버지는 술과 여자로 엄마 속을 문드러지게 만들었고 툭하면 주폭에 난리도 아닌 삶을 나에게 안겨주었던 거다.
다만 어릴 땐 나도 그런건 아버지를 닮았어서 정말 개나소나 나 좋다고 하는 여자들은 그 마음이 예쁘니까(!) 다 만나주고 그랬는데 이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어린시절에 어울렸던 형 누나 친구 동생도 4년이나 여자 구경도 안하고 사는 내 모습을 보고 상당히 의아해 할 지경.
그리고 술 역시 웬만하면 마시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가끔 만나면 마시지만 코시국이 겹쳐 거의 만나지 않기에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아는 여자애들이랑 마시는 술은 꼴꼴꼴 잘 넘어가지만 선은 절대 넘지 않으니까 무효표 처리.
여자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지만 어설프게 외롭다는 핑계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예전처럼 만나게 된다면 또 다른 우리 아버지가 될 것 같아, 여자와의 만남 자체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뭐 훌륭한 나의 반면교사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계시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아버지와 정반대되는 인생을 살고 있음에 오늘도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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