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개를 산책시키는 일은 숨 쉬기 만큼이나 중요했다. 어린 개 두 마리의 에너지는 넘쳐 흘러서 이를 방치한 채 직장에 갔다 돌아오면 집안의 각종 기물이 파손되거나 쓰레기 통이 엎어져 있기 일쑤였다. 확실한 해결법은 산책으로 기운을 소진해 놓고 나가는 것이었다. 출근시간에 늦지 않는 선에서 한 시간 정도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서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도시는 겨울이 되면 해가 늦게 뜨기도 했지만 종일 비가 내렸다. 새벽하늘은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비 내리는 거리는 인적 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개 두 마리는 형제였지만 성향이 정 반대였다. 한 마리는 얌전하고 겁이 많았다. 다른 한 마리는 눈 한쪽 없이 태어난 외눈박이로 시력에 문제가 있었으나 대담하고 저돌적이었다. 얌전한 개는 천천히 걸었지만 외눈박이는 출발 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 마냥 튀어나갔다. 성향이 다른 두 마리를 함께 묶고 같은 속도로 걷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목줄을 풀어놓을 수 있는 애견 전용 공원으로 산책을 갔지만 출근시간에 쫓기는 이른 아침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근처에는 걸어서 십 분이면 닿는 공원이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잔디밭을 중심으로 빽빽한 수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 가장자리를 둘러싼 곳이었다. 평소에는 조깅이나 산책 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비가 쏟아지는 겨울, 특히나 동트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기 때문에 개 목줄을 풀어놓아도 무방했다. 나는 새벽마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비를 맞으며 그곳으로 갔다. 숲으로 들어서는 공원 초입에 이르러서는 매번 머뭇거렸다. 가로등 하나 없는 그곳은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마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발을 딛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흥분한 개들은 재촉하듯 팽팽히 줄을 잡아당겼고 나는 그 어둠 속으로 여지없이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숲은 처음에는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깜깜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주변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모든 감각을 일깨워 수풀과 나무 뒤에 혹여 낯선 사람이나 사나운 야생동물이 숨어 있는지 살폈다. 개들은 초입에서와는 달리 숲길에 들어서면 얌전해졌다. 영리한 녀석들은 긴장감을 어김없이 감지해 냈다. 내가 숨 죽인 채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숨을 죽였고 절대 보채는 법 없이 얌전히 승인을 기다렸다. 탐색이 끝나고 목줄을 풀어 주면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개들은 사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내 판단과 선택에 온전히 의지하는 개의 맹목적인 믿음은 애틋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을 무겁게 했다. 책임의 무게감을 새삼 자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개와 나 사이의 신뢰 관계는 돈독하고 끈끈해졌으니 이 산책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었다. 그러나 몹시 고단한 것도 사실이어서 다른 여지가 있다면 일부러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상 숲은 깊숙이 들어가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은 태풍의 중심부처럼 고요했다. 어둠은 어느새 완벽한 안전막이 되어 무방비 상태의 동양 여자 하나와 개 두 마리가 숲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숲을 헤치고 다니다 보면 별의별 야생동물과 마주치게 된다. 섬뜩한 시선이 느껴져 나무 위를 올려다 보면 커다란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내려다 보고 있는 올빼미와 눈이 마주쳤다. 나뭇가지 위에 주먹만한 뭔가가 일렬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길래 자세히 보았더니 다름아닌 박쥐 무리였다. 너구리가 새끼 너댓마리를 이끌고 나무 위를 기어올라가거나 손바닥만큼 작은 야생 토끼가 풀숲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때로는 밥캣이라고 부르는 살쾡이와 코요테와도 마주쳤다. 밥캣과 코요테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제외하고는 숲에서 마주치지 말아야 할 위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놈들은 우리를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먼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기 바빴다. 어둠 속에서는 나와 개들의 존재가 그들 입장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위협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두려움은 비단 내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결국 공포란 스스로의 심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두려움을 유발하는 실체와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막연한 불안과 불확실한 지레짐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을 뿐, 실제 상황 속에 뛰어들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그 단계까지 가 볼 수가 없었는데 미리 도망치거나 회피해 버렸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문제가 현실이 되는 걸 바라보느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관없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정말 두려웠던 것은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닥치느냐 보다는 문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미숙하고 무능력한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작과 도전 앞에서 늘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마도 많은 기회와 인연을 놓치고, 보지 못한 채 지나쳤을 것이다. 정작 걱정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컴컴한 어둠이 보호막이 되고 살쾡이와 코요테가 우리를 공격하기는커녕 먼저 도망친 것처럼.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정 중앙으로 뛰어들어가자, 몸소 겪고 확인해 보자, 우려했던 결과가 명백한 사실로 판명된다면 그마저도 감당해 보자, 처음으로 그런 다짐을 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동안 너무 약해빠졌다고 후려치기만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꽤 단단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컴컴하고 인적 없는 숲 속에 들어와 있는 상황만 봐도 그랬다. 이 짓거리를 매일 하고 있다니. 그것도 오로지 개를 위해서. 이 정도면 책임감과 희생정신도 충분하고 꽤 용감하기까지 않은가.
"깨달음이 이런 상황 속에서 찾아오는 거라면 나나 석가모니가 다를 게 뭐가 있냐?"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어둠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우쳤다는 석가모니가 불현듯 떠올랐다. 뱉어 놓고도 이 말이 좀 우스워서 작게 낄낄대기까지 했다. 누군가 그러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분명 미친 사람으로 오인하고 황급히 도망가거나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삶이 바뀐 것만큼은 확실하다. 낯섦과 마주하기를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최악으로 치닫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고 도리어 어떤 반환점이 되거나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땐 그럭저럭 잘 헤쳐나갔다.
몇 년 후 외눈박이 개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얌전한 개 한 마리만 남았으니 이제 목줄을 메고 천천히 걸어도 상관없게 되었고 비 내리는 새벽, 어둠을 뚫고 숲에 갈 필요도 없어졌다. 따라서 그때와 같은 전투적인 산책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한낮의 숲은 새벽과는 백팔십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산책로에는 사람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잔디밭은 뛰어노는 아이와 산책하러 나온 동네 개들의 차지가 된다. 대기를 가득 채운 정적과 안개는 물러가고 밤사이 숲을 점령하던 야생 동물은 덤불 속 어딘가 꽁꽁 숨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나와 홀로 남은 개는 아무도 모르는 숲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때때로 외눈박이를 추억하며 그곳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