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받지 않는 세상
어느 누구도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받지 않는 세상.
평등, 의식, 자유 등과 같은 개념을 스스럼없이 꺼내 더 나은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예술은 어떤 태도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 책의 제목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1969년 스위스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렸던 큐레이터 하랄드 제만의 역사적인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에서 보어를 변형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미술의 관습적인 틀을 거부하는 새로운 작품의 형식과 전시를 제시했던 정신을 이어받아 태도로부터 탄생하는 작품의 가치를 탐구한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 또한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며 '일반적', '보통'이라는 이름 아래 권력을 지녀온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태도가 예술이 될 때>에서 박보나 작가는 각 챕터마다 다른 예술 작품을 소개하고 이를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적 현실과 밀접하게 서술해나간다. 글은 대부분《한겨례》에 연재했던 것들을 선별해서 다시 쓴 것으로, 2016-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굉장한 충격과 혼란에 빠져야 했던 당시 한국 사회를 언급하며 우리가 이제껏 해왔던 방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우리가 새로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저자는 미술과 사회의 연관성이 짙게 드러나는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소개하며 그 태도를 미술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저자가 '이 글을 나의 태도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정직하고 상식적인 사회를 절실하게 소망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 또한 함께 드러내고 있다. 두루뭉술 난해하게 여겨지는 현대미술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삶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는지를 실제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증명해주고 있다.
나는 미국 현대 예술가 바이런 킴(Byron Kim)의 대표작, <제유법(Synecdoche)>을 다룬 이 책의 두 번째 챕터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작품에 담긴 세상에 향한 작가의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지금 포스트-코로나라는 뉴 노멀을 맞이한 2022년에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강도를 당해 흑인이었던 용의자의 착의를 재판에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나요?"라는 질문에 작가는 "검은색이었다니까요, 그냥 흑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변호사는 커피 갈색, 옅은 갈색, 진한 검은색, 푸른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 등 검은색은 굉장히 다양하다며 '그냥 흑인'은 없다고 지적했고 작가는 당시 굉장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제유의 세계에선 개인을 구성하는 요소인 이름, 성격, 특정한 배경과 맥락 따위는 잡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어 잔인하게 소멸되고 개인은 '그냥 흑인'이라는 말로써 과-집단화되어 희미해지게 된다. '그냥 검은색'으로 치부했을 때 사라지는 수많은 푸른 검정, 붉은 갈색, 회갈색, 진한 검정들. 다채로운 인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간편하게 뭉쳐버리는 이 경제적인 논리가 참으로 소름 끼치게 느껴지기도 한다. 수만 가지의 색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은 순간, 이미 차별과 폭력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세상에 우리가 몰라도 될 것은 생각보다 없다고 본다.
한국계 미국 작가 바이런 킴의 대표작 <제유법(synecdoche)>은 흑인, 황인, 백인 정도밖에 이름 짓지 않은 우리의 관계 언어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4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피부색을 격자형 패널에 담았고 모델들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 판을 나열했다고 한다. 사회적 서열, 인식적 위계를 배제한 채 놓인 피부색들에게서 어떠한 중심이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집단화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캔버스를 덮고 있는 색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피부색처럼 차이를 더욱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가 가진 가치들을 이미 존재하는 이름에 욱여넣을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지켜낼 수 있다.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함부로 '제유'해버린 타자와 나의 개성과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제유'되면 사라질 사소해 보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나의 것을 절대 잃지 마세요. 우리는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다름은 드러내야 마침내 존재할 수 있다.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없는 셈 쳤던 모든 소외된 것들을 진실로 꺼내 주는 미술의 힘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로 다름을 수용해야 하는지 대한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태도가 ( )이 될 때'
'이 글 제목에 빈 괄호를 넣은 이유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세상과 글과 작품을 해석할 여지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작가들처럼 관습적 질서를 거부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 괄호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고, 어떤 것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이든 유연하게 그 시작과 끝을 열고 닫을 수 있다.' _박보나
우리는 어떤 태도로 괄호를 열고 닫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