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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Apr 08. 2024

책들의 시간 80.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 정지아 에세이, 마디북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십 대 대학생 이후로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사실, 술맛을 잘 모른다.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에는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자리 분위기가 좋아 사이다 한 병으로 그 자리에 참여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자리에 오랜 시간 있는 것이 힘들어졌고, 맛도 없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다. 술을 참 좋아하는 남편이라, 꼭 반주로 술을 마시는데, 그런 자리에 함께 해 주지 못하는 것, 그래서 집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것, 그런 것은 좀 미안하다. 

  좋아하는 부장님이 있다.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사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같이 맥주는 마시면서, 이 사람과는 저녁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면 참 좋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사람, 참 좋은 관계인 것 같다는 생각. 

  이번에 읽은 책은 술과 관련된 수필집이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제목에서 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술임을 짐작할 수 있는 제목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는 세상이겠지만.     

 

1. 스무 살 무렵, 그날의 분위기


  초승달 달빛 아래 신비로운 어둠의 정령 같았던 나무들이 짙푸른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다 못해 시꺼먼 호두 한 알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시커먼 호두 한 알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들의 축제의 밤이 끝났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을 뿐이다. 호기심 어린 독자들께서 뻔한 상상을 하지는 않을 테지. 내가 말술임을 확인했을 뿐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승달과 밤바람, 그리고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바닥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을 뿐이고 그때마다 어쩐지 나의 존재를 상대에게 온전히 들킨 듯 부끄러웠을 뿐이다. 

  첫차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신데렐라처럼 구두 한 짝을 남기진 않았지만 마음의 한 자락은 어느 나뭇가지에 슬쩍 걸쳐두고 나온 게 아니었을까? 두고두고 그날이 가슴 시리게 그리웠던 것을 보면 그 집을 빠져나올 때 밤에는 보이지 않던 새가 목청 높여 울었다. 축제의 밤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라도 되는 양.(49쪽)


  책에 참 재밌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리게 아팠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스무 살 무렵 대학에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만난 친구, 유난히 손재주가 많고, 재능이 많아 많아 친구들이 참 많던 친구, 싱그럽고 똑똑하고 깔끔하고 능청스럽던 그런 친구, 스무 살 무렵 작가는 그 친구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 함께 담금주를 마시며 밤을 보낸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의 한 자락을 그 자리에 두고 온 듯한 느낌. 작가는 한동안 그 친구를 잘 보지 못하고 그냥 고향 친구로 그렇게 지내왔다. 나중에 고향 시장에서 작가가 다시 만난 그 친구는 인생의 굴곡을 거치면서 실명을 하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레다 마음이 콱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어린 날 그 밤의 공기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작가의 이름을 부르는 그 친구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스무 살 무렵 대학에 들어가고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 근처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고3 생활 내내 제일 친했던 친구와 그 친구의 남자 친구, 그리고 나에게 독수리 5형제를 예를 들어 고도리의 고스톱을 가르쳐 준 친구, 그렇게 네 명이서 동네 근처 바닷가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세워져 있는 배에 막 올라가 겨울 바다를 보았다. 너무 까만데, 물결은 보이고 나도 모르게 뛰어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그 겨울 바다에 울리던 웃음소리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좋았다. 술이 주가 아니지만, 술 마시고 기분이 좋았던 몇 안 되는 기억 중의 하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스무 살 무렵의 그 분위기와 그 기억들.      


2. 그때보다 지금, 더 찬란한 오늘이 되기를. 


  나에게도 찬란한 젊음의 시절이 있기야 했겠지. 그때의 나는 몸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몸 따위, 하찮았다. 정신은 고결한 것, 육체는 하찮은 것.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모든 행위를 혐오했다. 혐오라니, 몸이 있어 정신이 존재하는 것인데, 젊은 나는 참으로 하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찮게 천대해 왔던 나의 불쌍한 몸에게 블루를, 귀하디 귀한 블루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름다운 육체가, 찬란한 젊음이 펼쳐 보이는 어느 여름날의 천국에서. 

  해맑은 아이는 소설의 길을 버리고 드라마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아이는 여전히 해맑다. 때로는 신이 나서, 때로는 좌절하며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아이의 앞날이 그날의 수영장에서처럼 찬란하게 빛나기를!(263쪽)


  ‘젊음’을 부럽다 여기지 않았다. 나의 젊음은 하찮고 초라했으며, 지우고 싶은 기억이 더 많았다. 술을 먹고 계단에서 넘어져 온몸에 멍이 들었던 적도 있었고, 술 때문에 기억을 잃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몰라 불안해했던 기억도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며, 누군가를 붙잡고 엉엉 울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맨 정신은 아니었다. 그럴 때 술이 있긴 했다.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며, 젊음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 봐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못생겼었다. 지금도 예뻐진 건 아니다. 그런데 젊을 때,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싶었으나 못생겨서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지금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참 좋다. 그냥 자신만의 세상이 있고, 누구든 중심과 주변의 삶을 교차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 내가 요즘 ‘젊음’이 부럽다. 나이가 들수록 뒤늦게 생의 중요함을 알아, 조금 더 몸이며 마음을 아끼고 살 것을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살아보니 지금이 좋아서, 그때도 좋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마음이다.      


3. 정리


  일행들은 젖었다 마른 등사화를 벗고 서로의 다리 위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올려놓은 채 이내 곯아떨어졌다. 얌전하고 소심한 A가 우렁차게 코를 곤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유난히 크고 밝은 만월이 기차를 따라 함께 달렸다. 산은 우리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고, 술도 그러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허물을 덮기도 한다.(86쪽)


  책을 읽으면서, 조니워커의 블루라벨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선생님들에게 그런 말을 하니, 술도 마셔 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말씀들 하셨다. 그러면서 ‘캡틴큐’를 먼저 먹어야 한다고. 아니, 책에서 본 그 술을 샘들은 아는구나, 그런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여전히 나는 술을 모른다.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잠깐 스치긴 했으나, 출퇴근의 피곤함과 술 마신 이후의 피로함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의 적당한 술자리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아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와 그 속에 드러내는 한 줄기 진심의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싶어서.      


[이야기 나눠 보기]

1)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면 나눠 봅시다. 언제 누구와 함께 한 술자리며, 왜 기억에 남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특별히 좋아하는 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왜 그 술이 좋은지, 그 술의 맛을 표현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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