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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Dec 18. 2022

누가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나요?

#19  홍콩과 싱가포르



누가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나요?




예, 그게 접니다.




2012년 1월, 갑자기 싱가포르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 외삼촌은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나가 계셨는데, 문제는 2월 말 외숙모가 들어오실 때까지 어린 사촌동생이 혼자 있게 되었고 삼촌은 엄마에게 혹시 잠깐 싱가포르에 올 수 있냐는 부탁을 했다.


겨울 방학에 복수 전공 준비 외에 딱히 할 것이 없던 나는 엄마와 함께 가기로 했다. 엄마는 내게 항공권 구매를 맡겼는데, 작년에 친구와 태국, 홍콩 여행을 다녀오며 탔었던 ‘캐세이퍼시픽’이 불현듯 생각났다. 직접 항공권을 구매한 경험이 없었기에 가장 최근에 탔던 항공사가 떠오른 것이기도 하지만, 싱가포르와 관련도 없는 항공사가 떠올랐던 것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ESTJ와 ENFP의 여행법



바로 직전 여름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와 나는 종강을 기념하며 간단히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러 만났다.


"이것 봐. 제주도 가는데 100만 원이나 들어. 우리 이 정도면 동남아도 갈 수 있지 않을까?" 부지런히 항공권 사이트를 찾던 내가 물었다.


"그럼, 그냥 동남아 가자. 여권에 도장 한 번 찍어야지." 나의 제안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승낙했다.


결정이 빠른 그녀와 아이디어가 샘솟는 나, 우리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만난 지 10분 만에 행선지를 바꿔버리고 단 몇 번의 검색만으로 제주도와 맞먹는 금액의 동남아 패키지를 찾아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쇼핑의 도시 '홍콩'동남아의 제왕 '태국'을 모두 섭렵해 버릴 기회라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스무 살이 되고 난 뒤 떠난 첫 자유여행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에 오른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일자별로 빼곡하게 세워진 계획표를 건넸다. 그녀의 지휘 아래 우리는 매일 저녁이면 숙소 테이블에 지도를 펴 놓고 가야 할 곳을 표시하며 동선을 외웠다. 일정이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마치 큰일이 날 것처럼, 왕궁을 둘러보다가도 다음 일정이 다가오면 서둘러 이동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우리는 홍콩을 하루 만에 다 돌아보고, 마카오는 첫 배와 마지막 배로 당일치기를 했으며 그 안에 북섬과 남섬을 다 돌아봤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이겨내며 지하철 역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대기가 엄청 길었던 맛집도 갔다. 맛있었다. 그 정도로 진을 뺐으면 돌이라도 맛있었을 것이다. 보고 맛본 것은 많았지만 진정으로 감상하고 느끼지는 못했다. 어렸을 적 학습지를 다 풀면 받는 스티커로 포도 한 송이를 만들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포도알을 열심히 모아 나갔다.


마지막 날은 각자 일정을 보내고 자정 귀국 시간에 맞춰 호텔에서 만나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시간을 충분히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바로 주말 저녁의 홍콩 시내 교통 체증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보딩 시간을 30분 남겨두고 아슬아슬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텅 빈 공항의 카운터 앞에서 우리의 여권과 e-ticket을 받아 든 승무원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어쩌죠. 이코노미석이 만석이네요."


'뭐야, 티켓을 팔아놓고 만석이라고 하면 어떡해.'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도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남은 좌석이 딱 두 석이 있는데, 비즈니스석이에요. 대신... 두 분은 떨어져 앉아야 해요. 괜찮을까요?"


승무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동시에 'Yes!'를 외쳤다. 몇 초 간의 텀을 뒀어야 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망설임 없이 내뱉은 그 한 단어에 모두가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당연한 거다. 성인이 되고 처음 떠난 여행에서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라니! 비행기를 타게 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 흔치 않은 탑승 경험은 나에게 두 가지 강렬하고도 헛된 인상을 남겼다.


1. 캐세이퍼시픽은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 주는 좋은 항공사다.
2. 온라인 체크인을 미리 하지 않고 시간을 딱 맞춰 도착하면 좌석 업그레이드를 받을 수 있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에서도 홍콩이 거점지라 환승이 꼭 필요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또 업그레이드를 받을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하여 제일 비싼 가격으로 판다는 항공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싱가포르 환승 항공권을 1인당 130만 원에 예약하고 무척이나 뿌듯했다.


2주 정도 함께 지내다가 엄마는 먼저 귀국했고, 다음 학기 개강까지 시간이 있던 나는 좀 더 머물기로 했다. 다행히 비싸게 주고 산 덕을 좀 봤다. 탑승 날짜 변경이 무료로 가능해 돌아가고 싶을 때 귀국할 수 있었다. 취업의 걱정이나 중요한 시험도 없었고, '3박 4일 만에 싱가포르 전부 돌아보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 동안
한 나라를 구석구석 탐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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