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면 밤이 되어버리는 몽환적인 '북극의 파리' 트롬소 돌아다니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줄의 표현에 매료된 나는 정말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트롬소(또는 트롬쇠)Tromsø 라는 곳은 여행 계획을 짜기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곳이다. 겨울 북유럽 여행 계획을 짜면서 어디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지 검색했더니, 노르웨이 어딘가에 있다는 트롬소라는 곳이 나왔다. 오로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로라를 보러 굳이 또 다른 도시로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트롬소에 가기로 했다. 누군가 트롬소를 보고 '북극의 파리'라고 표현한 것을 본 뒤로 말이다.
트롬소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사실 나는 '트롬소라는 곳이 진짜로 존재하는 곳이기는 한 거야?!'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다. 일단 살면서 이런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모든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게으르게 여행 계획을 짜는 바람에 이 곳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내가 정확하게 아는 건 오직 숙소 주소 뿐이었다). 게다가 올레순에서 오슬로로 오는 비행기가 지연되는 바람에 오슬로 공항을 질주하며 트롬소로 가는 비행기를 10분 만에 기적적으로 환승한 탓에, 내 짐이 지금 나와 같이 무사히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서 사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 트롬소에 도착했는데, 활주로에 눈이 이미 가득 쌓여있었고 그만큼의 눈이 하늘에서 더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컴컴한 비행기에서 짐 걱정에 시달린 나는 내가 얼마나 북극에 가깝게 가고 있는지 미처 실감하지 못했는데, 내리자마자 엄청난 눈의 양과 추위와 마주하며 내가 북극권에 도착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돈을 아끼겠다며 올레순에서 트롬소로 가는 최저가 티켓을 끊고선 만족해했지만, 나란 허술한 사람은 이 최저가 티켓 비행기가 한밤중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심지어 비행기를 갈아타기까지 해야했다....). 그리하여 결국 미친 물가의 나라에서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숙소에 가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ㅎ 이 이후로 나는 최저가의 함정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조금은 똑똑한 호구(..)가 될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나도 짐도 무사히 포근한 숙소에 도착했고, 기절할 듯이 잠을 잔 이후에 평소처럼 느지막이 11시쯤 일어났다. 그리고, 나의 게으름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창밖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일찍 진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정오도 안 된 시간부터 어두워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밝은 것도 아니고, 저녁 같지도 않고, 오묘했다. 흐린 날이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햇빛이 간밤에 더 많이 쌓인 눈에 반사돼서 밝아 보이기도 했다.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마을은 완전한 겨울 세상이었다. 시내까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지도를 보고 막연하게 시내 방향이겠거니 생각되는 곳으로 그냥 걸어갔다. 나는 안 그래 보여도 사실 꽤 방향감각이 좋은 편이다.
북극으로 향하는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황량한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쓸쓸한 풍경인데도 참 아름다웠다.....고 감탄하기도 전에, 너무 추워서 더 이상 걸어가는 건 미친 짓이란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래서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버스 정류장까지도 한참을 걸여야 했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는데, 정말 어쩜 그렇게 차 한 대도 지나다니질 않는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시내에 도착했다. 비로소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아주 서글픈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아주 반가운 사실을 발견한 건 참 기쁜 일인데, 어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 이 도시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정보조차 없었다. 트롬소에 도착해서 자기 전에 대충 검색해보니 북극 박물관이 있다고 하길래,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갔다. 나는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다. 말 그대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북극 박물관에선 북극권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북극곰에 대한 전시물도 많았고, 특히 강조하고 있는 건 아문센이었다. 아문센은 트롬소를 기점으로 북극 탐험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트롬소 사람들은 아문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 보였다.
박물관에 큰 감명을 받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지만, '북극'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나에게는 몹시 흥미로운 박물관이었다. 극지방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여러 가지 전시물들을 보다보니 흥미가 생겼다. 추위를 피하러 들어간 곳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유익함을 얻고 나와서 마음이 한껏 뿌듯해졌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만한 규모는 또 아니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미 이 곳은 저녁이 되어있었다. 아직 오후 2시인데.
오후 2시가 이렇게까지 어두울 수 있다니, 이건 거의 저녁 7시 모습이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얼떨떨해하며 시내로 나왔는데, 내 눈 앞에는 말 그대로 '윈터 원더랜드'가 펼쳐져있었다. 밤 같은 오후, 가득 쌓인 눈, 그리고 그 눈에 반사된 몽환적인 분위기의 크리스마스 조명들.
눈이 쌓이는 양이 어마어마해서 또 한번 놀랐다.
캐롤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이 동화 같은 곳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이 분위기를 더욱 만끽하려면 핫초코가 필요하단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시내의 작디작은 카페에 들어가 이 비현실적인 동네를 바라보며 허세의 시간을 누린다. 아직도 오후 3시가 채 되지 않았다.
딱히 할 건 없는데 벌써 깜깜해졌고, 분위기는 너무나 환상적이라 집에 갈 수는 없고. 그래서 그냥 항구 쪽으로 걸어가 봤다. 북극권의 중심도시답게 크고 작은 배들이 꽤 많이 선착돼있었다.
추위에 덜덜 떨며 쉴 새 없이 쏟아붓는 눈을 맞으며 북극으로 향하는 배를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두근두근해졌다. 불현듯 나도 정말로 북극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세계 같았고, 그 미지의 세계가 정말로 내 코 앞에 닥쳐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분위기까지 몽롱해서 그런가 정말로 나는 마음이 두근두근했는데, 감히 생각해보자면 아문센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다음 날에는 트롬소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전망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거야말로 해가 지면 안 되기 때문에, 나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고 숙소에서 나왔다. 갈 때까지만 해도 해가 어느 정도 떠 있었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도착하니 전날보다 심지어 해가 더 빨리 졌다. 본의 아니게 오후에 야경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망대엔, 정말로 사람이 10명도 없는 것 같았다. 도시가 보이는 쪽 말고 뒤쪽으로 가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NOTHING이다. 멋도 모르고 뒤로 나가는 문으로 나가봤다가 눈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눈 쌓인 절벽만 있는 것 같길래 그 추위와 무서운 풍경에 식겁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마저도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지만.....
해가 떠있을 때 보고 있었지만, 북극권의 해가 지는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결국 오후에 야경을 보게 된다. 이때가 오후 2시쯤이다. 한겨울의 북극권이란, 내 상식의 시간 개념이 완전히 파괴되는 곳이었다.
오로라는 결국 아이슬란드에서 보고, 트롬소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트롬소는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비현실적인 도시 중에 하나다. 아이슬란드보다도 해가 빨리 졌다(지도를 보니 더 북쪽에 있기는 하구나). 크리스마스를 앞둔 그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엄청난 양의 눈과 함께 극대화된 곳이었다. 실제로 나는 트롬소에 이어 아이슬란드를 다녀오면서 '북극'이라는 곳 자체에 대한 큰 환상이 생겼다. (그래서 내 다음 목표 여행지는 일반 여행객으로서 가장 북극에 가깝게 도달할 수 있다는 '스발바르 제도'다). '윈터 원더랜드'라는 노래를 실제로 체험하게 해준 특별한 북극권의 도시. 아름답고 낭만적인 분위기와 약간의 쇼핑의 편리성 때문에 '북극의 파리'로 불린다지만, 그래서 나 역시 그 표현에 매료되어 이 낯선 곳으로 떠난 거지만, 트롬소는 트롬소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만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눈부신' 밤을 낮부터 만끽할 수 있는 트롬소는 다른 도시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이 특별하게 아름다운 도시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렇지만 타고난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은 경치 좋은 곳에서 그저 멍 때리기만 하는 사람의 여행기. 세상은 넓고 기웃거릴 곳은 정말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