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얼굴을 상징하다.
사진 · 글 · 편집 김용성
명동대성당이 위치한 이곳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명동 언덕에 위치해있다.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토마스)의 집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다른 신부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며 공소 예절을 드렸었다. 그러던 도중 포도청 당국에 의해 적발되어 김범우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는 길에 사망하였고 1886년 조불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에서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 후 이곳엔 한국 최초의 본당 ‘명동대성당’이 탄생하였다.
명동대성당 설계를 진행한 사람은 신부 코스트(한국명 고의선)가 직접 맡았다. 한국 최초로 지어진 고딕 양식 건물이기만 그때 당시 한국에는 양옥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에 벽돌공, 목공, 미장 등 중국에서 온 기술자들이 일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땐 공사가 지연되기도 하는 등 공사를 진행하는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892년 5월 정초식을 시작으로 1896년 벽체 공사가 마무리될 때쯤 설계를 맡았던 코스트(고의선)는 죽고 신부 프와넬이 이어받아 내부공사를 마무리하여 1898년 5월 축성직 거행했다. 공사기간만 6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고 그 당시 공사비 6만 달러가 사용된 대공사였다. 그에 걸맞게 길이 약 68m, 넓이 약 29m, 높이 약 23m으로 약 420평이 넘어가는 규모이다. 가장 높은 곳은 종탑 부분인데 그 높이는 약 46m 정도이다. 지어질 당시에 시대상을 생각한다며 이는 큰 규모에 속한다. 모두 완공이 되고 입소문이 흔히 동네 주민들에게 “뾰족 건물”이라고 불리며 매일매일 구경 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또한 대성당의 사용된 주재료는 적벽돌과 회색 벽돌을 사용했다. 이 벽돌들의 출처는 용산 방 부근이다, 한강 통 연와 소이다. 라며 말이 많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벽돌로 지어진 것은 확실하다.
창의 형태는 모두 첨두아치를 사용하여 고딕 양식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대첨탑을 기준으로 양쪽에 소첨탑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명동대성당은 종교건물로서 교회적인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가지고 있다. 대성당이 이 장소에 위치하기까지 많은 역사와 사건을 겪으며 탄생했다. 그렇게 명동대성당은 후에 생긴 다른 본당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이 되며. 새로운 사목 활동을 밑바탕이 된다.
또 어느새 이곳은 단순히 상징적인 종교 건축물이 아닌 사회적인 장소로 자리 매김 한다. 예배와 미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이 함께 쉼을 위해 방문하기도 하며 작자처럼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들어서면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어느새 명동을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고 명동의 얼굴이 되었다.
슬프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 결과다. 어쩌면 그 당시 아픔을 현대에 와서라도 위로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며 찾아와 주는 것, 진심을 담아 기도하기 위한 이들이 찾아와 주는 것만큼 위로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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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