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의 실수
PC사업에서는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두 회사와의 비즈니스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2013년 IT사업부장이 되고 나서 인텔 코리아 사장과 담당 전무를 만났다. 당시 우리는 PC사업에서 대규모 적자를 보고 있는 반면 경쟁사는 한국시장 점유율 50%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인텔에게도 우리보다는 경쟁사가 사업적으로 우선인 파트너였다.
나는 그 무렵 일이 많고 바빠서 일요일로 점심 약속을 제안했더니 인텔 쪽에선 좀 의아해했다. 해외기업에선 특히 휴일에 업무상 미팅은 드문 일일 것이다. 양측은 여의도에서 만나 PC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우리가 먼저 주요 안건을 꺼냈다. 현재 우리의 PC사업이 어려우니 인텔에서 마케팅 지원금을 좀 부담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인텔 지사장은 마케팅 펀드보다는 경쟁사 현황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 경쟁사는 PC사업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계획이라며 그렇게 되면 천만대 이상을 판매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판매량은 백만대도 채 안 됐는데 천만대라니. 경쟁사이지만 놀라웠다. 당시 경쟁사의 PC사업부장은 부사장급으로 생산과 SCM의 전문가였다.
이때만 해도 우리의 PC사업은 초라하기만 했다. 경쟁사의 화려한 성과를 늘어놓던 인텔 사장의 의도 역시 성과를 못 내는 회사에게는 자금을 투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텔 한국지사장과의 미팅은 별 소득 없이 자존심에 상처만 남기며 끝이 났다.
한편 그 무렵 애플의 아이패드가 돌풍을 일으켰고 안드로이드 진영도 태블릿 PC를 경쟁적으로 출시했다. 경쟁사 역시 스마트폰에서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에 갤럭시 탭을 출시하며 시장을 확대해갔다. 그리고 PC사업을 스마트폰 사업부에 통합시켜버렸다. 태블릿의 확산을 보며 이젠 PC를 스마트폰 사업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리도 한때 PC사업부를 모바일 사업에 통합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통합 후 PC사업이 더 어려워지자 다시 분리해서 원래의 사업본부로 복귀시켰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태블릿 PC가 노트북 시장을 대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앞으로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기존의 PC를 대체하고 결국 노트북 시장은 스마트폰 시장에 흡수될 거라 전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급한 판단이었다. 태블릿은 노트북을 대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노트북은 콘텐츠를 작성하고 만드는 기능이 중요한 반면 태블릿은 주로 콘텐츠를 검색하고 소비하는 디바이스이기 때문에 두 기기는 사용 영역이 다르다. 따라서 입력방식도 다르게 된다. 콘텐츠를 만들 때 태블릿의 터치 방식은 노트북의 키보드와 마우스만큼 자유롭고 편리하지 않다.
경쟁사는 이 지점을 간과한 것 같다. PC를 스마트폰 사업에 통합하고 나니 기존 스마트폰 인력들이 PC사업에 간섭하고 의사결정까지 했다. 그로 인해 PC사업은 더 위축되고 의사결정에서도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경쟁사에서 이런 상황이 몇 년간 지속되자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램을 출시했을 때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PC사업의 주관자인 스마트폰 사업부가 노트북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전처럼 독립된 PC사업부가 노트북을 맡고 있었다면 거센 대응이 있었을 것이고 그램은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경쟁사가 PC사업에 대해 판단 미스를 하게 되면서 그램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 점 또한 우리의 노력에 더해져 그램을 성공시킨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