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청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섬유공장에서 3남 3녀와 할머니의 9 식구 대가족을 돌보며 한평생을 일터에서 보내신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자랐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우리 집에는 언제나 부지런함과 검소함, 그리고 정직함이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아버지는 늘 말씀이 적으셨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시청으로 출근하는 뒷모습만으로도 자식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책임감’을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가족들을 위해 집안일을 하셨고, 그 손길에서 나는 ‘희생’과 ‘근성’의 의미를 배웠다.
그 환경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인생을 살아오면서 흔들릴 때마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길잡이가 되었다.
학업, 배움으로 내 삶의 기초를 만들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며 자연스럽게 성실의 중요성을 느꼈다. 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무엇보다 배움이 나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대학에서는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건축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건축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에 “하면 된다”는 확신을 심어준 첫 번째 보람이었다.
첫 직장, 산업화와 함께한 시간들
졸업과 동시에 나는 광양제철소 건축설계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은 8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의 중심이었다.
남해안의 아무것도 없던 푸른 바다 위에서 거대한 제철공장이 올라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경험은, 그 자체가 배움이자 큰 경험이었다.
그 후 포스코휼스로 근무지를 옮겨 국내 최초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 공장 프로젝트에서 건축과장을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반도체 핵심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를 외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시절이었기에,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려웠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배우며 성장했다.
내 삶에서 첫 번째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직접 경험한 시절이기도 했다.
삼성, 성장과 도전, 그리고 나를 단단하게 만든 시간
내 삶의 전환점은 삼성 입사였다.
경력사원 건축과장으로 들어간 엔지어링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세계였다.
국내 삼성그룹 화학공장, 산업시설, 건설현장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하루하루가 치열한 싸움터 같았다.
날씨와 싸우고, 일정과 싸우고, 안전과 싸우며, 수백 명의 인력을 이끌며 공사를 완공해야 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는 ‘몸으로 배우는 현장은 진짜 스승이다’라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부산 해운대 아쿠아리움 프로젝트는 특히 잊지 못할 현장이다.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철골을 올리고, 밤을 새워가면서 지하연속벽을 시공해 나갈 때 수족관 건물은 “하나의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 공사를 수행하면서 나는 건축시공기술사에 합격했고, 회사 지원으로 서울대 MBA 과정을 수료하며 실무·이론·경영을 모두 갖춘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삼성은 나에게 많은 보답을 주었다. 자랑스러운 엔지니어링상, 노동부장관상(안전관리 초일류현장), 200만 시간 무재해 달성, 그리고 많은 프로젝트 성공 경험들.
재직 중 부동산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것도, 나중에 건물주로 살아가는 기반을 닦게 해 준 결정적 연구와 배움이었다.
중국 16년, 해외에서 다시 시작한 도전과 성취
예상치 못했던 순간, 나는 중국 현장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 생활이 16년으로 이어졌다.
중국현장 부임 초기에는 언어도, 환경도, 문화도 모두 낯설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임원 승진을 이루었고,
삼성반도체 시안공장 프로젝트의 주재임원으로서 많은 난관과 정책 변화 속에서도 수백 명의 한국 직원과 수천 명의 중국 인력을 이끌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장 치열하고,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으며 가장 크게 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넓은 사업을 하고 싶었고, 오랜 삼성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중국에서의 두 번째 인생, JV 창업 6년
삼성 퇴사 후 중국 건설업체와 합작 법인(JV)을 설립해 6년간 건설사업을 이어갔다.
삼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은 더 치열하고, 더 복잡하고, 더 예측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중국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그 경험은 사업을 운영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의 판을 흔들었고, 나는 16년의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건물을 짓고, 건물을 운영하는 삶
귀국 후 나는 그동안 준비해 온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서초동에 6층 건물을 신축하여 소유하게 되었고, 이어서 이태원 빌딩 두 채를 매입하며 건물주의 삶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꿈꾸던 ‘나의 건물을 갖겠다’라는 말을
현실로 이룬 순간이었다.
건물 공사와 운영, 임대와 관리, 건물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내가 평생 쌓아온 ‘건축’이라는 기술과 ‘부동산’이라는 지식, 그리고 ‘경영’의 감각이 모두 모인 결과물이었다.
이제는 글을 짓는 사람, 은퇴 후의 커리어
인생 후반부의 삶의 선물은 글쓰기다.
중국에서 귀국 후 중앙대의 “내 이름 박힌 책 내기 과정”을 수료했고, 브런치 작가로 등단하며 이제 나는 건축물이 아닌 ‘문장’으로 나의 글로 책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서초동과 이태원 건물을 소유 관리하며, 두 아들과 며느리들, 손자·손녀를 둔 가장으로 살아가고, 지인들과의 반가운 모임을 이어가며, 일 년에 여러 번 해외여행을 다니는 건물주이자 브런치 작가로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써며 살고 있다.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왔지만, 돌아보면 결국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 해야 할 것’을 묵묵히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크게는 건물을 짓고 중국에서 회사를 운영한 일부터, 작게는 하루 한 시간씩 공부한 일까지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단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인생은 결코 한 번에 뒤집히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선택이 쌓이면, 그 선택들은 어느 날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나는 평범한 공무원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고,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온 엔지니어였으며, 그저 열심히 삶을 배운 학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실행력, 성실함,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나를 삼성 임원으로 만들었고, 중국 사업가로 만들었고, 강남 건물주로 만들었고, 마침내 브런치 작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여러분의 인생도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지을 수 있다."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너무 늦은 꿈도 없다.
너무 늦은 도전도 없다.
오늘 한 걸음을 내디딘 사람이 내일을 바꾸고, 그 내일이 모여 인생을 바꾼다.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인생의 건물주는, 언제나 ‘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내 인생의 건물주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