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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Feb 07. 2023

나쁨에 대한 독백 - 1

[West] “내가 이번에도 나빴습니까?“


나쁨에 대한 독백



때로는 제대로 된 마무리 없이 어떤 시절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것 같다. 함께 가져본 커다랗던 기대와 그것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날의 망연함,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감정들과 결국 앞에 놓인 잔여물까지. 그 시절 속 모든 매듭을 헐거운 채로 남겨두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돌아 나왔다. 이따금 내게 불운이라 여겨지는 일이 벌어질 때면 이건 최선을 다하지 못한 마지막들, 다시 말해 내가 나빴던 순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아닐까 하며 견디기도 했다. 바쁘고 치열한 일상을 살다, 문득, 내가 내버려두었던 누군가의 닮은꼴을 목도할 때면 지금도 잠시 숨이 멎는다.


내가 정말 나빴냐고, 그날의 내가 정말 잘못했냐고 묻고 싶은 날들 중에는 ‘독도고시원’이라는 공간이 자리한다. 독도고시원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도로변 낡은 3층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고시원이었다. 녹물 자욱이 짙게 그려진 독도고시원의 푸른 간판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쓰인 ‘OO사’라는 절인지 철학관인지 끝내 알지 못한 2층의 간판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 1층은 시끄러운 소음이 끊이지 않던 공업사가 자리했다. 그런 까닭에 독도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고등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노동자들과 고시생들이 주로 묵고 있었다. 그랬던 독도고시원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할 즈음이었다.


일 년만 더 지나면 고3이라는 불안감에 하나 둘 바짝 공부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고, 당시 기숙사 사감들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퍼지면서 삼삼오오 학교 근처 고시원에 들어가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대다수는 정문 옆에 위치한 조금 크고 말끔한 고시원에 들어갔는데, 월세가 조금 높았던 탓에 고민하던 아이들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바로 독도고시원이었다. 창문 없는 방 기준으로 월 13만 원이면 지낼 수 있던 독도고시원은 당시 학업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얽힌 사정으로 인해 급하게 고시원을 알아보던 내게 혹할 만한 선택지였고 서둘러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 많은 시간 행복했다. 책상 위로 의자를 올려야만 겨우 누울 수 있던 방의 구조나, 하얀 형광등을 끄면 낮이나 밤이나 한 점 빛조차 찾을 수 없던 어둠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오롯이 동고동락했던 대여섯 명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학교에서는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던 친구도 있었지만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모인 우리는 같이 전기밥솥에 밥을 해 먹고, 근처 편의점에 가서 꿈과 불안 또는 열여덟밖에 안되었지만 충분히 다채롭던 삶의 기억들을 공유하며 금세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이따금 다 같이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자버려서 헐레벌떡 학교까지 뛰어갔던 날의 아침 공기나,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즉흥적으로 심야영화를 보러 갔던 밤의 습도 따위는 여전히 생생하고 아련하다. 그리고 그 감각들 한가운데 빠질 수 없는 이름이 해준이다.


해준이는 1학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이따금 농담을 나누기도, 모르는 문제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 외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둘이 성향이 다르기도 했고, 시간을 보내는 무리가 달랐던 탓도 있었다. 어떤 계기로 둘이서 독도고시원 얘기를 꺼내게 되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해준이가 어느 날부터 내 옆방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해준이가 PMP에 영화를 다운 받아오면 나란히 좁은 방에 누워 잠들기도 했고, 그 나이 때 있을 법한 연애 고민이나 진로에 관한 갈등을 밤새 주고받으며 서로 의지했다.


지금 박힌 돌에게 지랄이냐며 밤 11시에 방에서 고등어를 구워먹던 아저씨나, 술을 마신 뒤에는 항상 좁은 복도 끝을 향해 욕이 섞인 고함을 내지르던 맨 끝 방 사람과의 실랑이도 겪으며 독도고시원에서의 생활은 다사다난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두가 잠시 집에 다녀왔던 주말이 있었다. 집에서 부모님과의 마찰을 빚고 바스러진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돌아온 건물 앞에 해준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해준이와 한 뼘 정도 떨어져 앉았다.


닫힌 공업소 철문 앞에서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자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음속 상처나 외로움, 부담감 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공감했고, 위로했으며, 나아가 대신 욕을 했다…. 그 덕분에 서로 제 가족 욕을 듣고는 또 화가 나서 한바탕 싸웠다. 네가 뭘 아냐며 소리 지르다가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고, 우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뭐 하냐. 그날 이후 나와 해준이는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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