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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Feb 09. 2023

나쁨에 대한 독백 - 2

[West] “내가 이번에도 나빴습니까?“


나쁨에 대한 독백 - 2



특히나 학교에서는 다소 강하고 거친 편에 속하는 해준이가 내 앞에서만큼은 순해지고 본인의 유약한 면까지도 모두 공유한다는 사실에,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고 부끄러운 감정이지만, 조금의 우월감도 느꼈던 것 같다.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괜히 천변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며 해준이는 X대 행정학과에, 나는 Y대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해서 꼭 같이 서울로 올라가자고 약속했다.


그 시절에 균열이 생긴 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정말로 우리가 고3이 되면서 조금씩 예민해진 탓에 별 거 아닌 일에도 짜증이 치솟기도 했고, 정서적으로 무너질 때 서로를 찾았던 만큼 이따금 그 시간과 역할이 다소 버겁게 느껴지던 순간도 생겨났다. 내신 등급이 마음처럼 나오지 않은 날에는 괜히 시험 전날 해준이의 공부를 도와줬던 내 시간을 탓하기도 했다. 해준이가 먼저 부탁한 적도 없었고, 나 혼자 좋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 아이에게서 핑계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자꾸만 내 모든 불안과 초조함의 원인을 애꿎은 해준이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나의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조금 더 솔직하게는 그 균형을 지키지 못하는 원인이 해준이 때문일 것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4월 말 즈음이었을까, 말없이 함께 고시원으로 돌아가던 밤에 독도고시원을 나갈 거라고 해준이에게 선언했다.


지금도 습관처럼 자주 얘기하는 ‘인생 얄궂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정말 얄궂게도 독도고시원을 나오고 3일 만에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약 1년 반 만에 집에 돌아가려던 계획은 틀어졌고, 나는 급하게 또다시 고시원을 구했다. 이번에는 독도고시원도, 정문 앞 고시원도 아닌, 20분 넘게 걸리는 위치에 있는 시내 한복판의 고시원을 잡았다. 더는 해준이에게 우리집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따로 설명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뒤늦게 다른 친구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은 해준이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나는 해준이가 느꼈을 상실감과는 전혀 무관한, 당시 나에게 닥친 비극만을 이야기하며 도리어 화를 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아직도 상처 받은 그때 해준이의 얼굴이, 표정이, 눈이, 목소리가, 뒷모습이 선명하게 재현된다. 그날 이후에도 해준이는 독도고시원에 수능 때까지 남아있었고, 그 나날들이 어땠을지 나는 모른다. 그렇게 해준이를 남겨둔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시기를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멀어졌다. 해준이를 잃었다.


그날의 대화 이후, 해준이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몇 번 없다. 더는 서로의 감정을 묻지도 먼저 말하지도 않았고, 가벼운 학교생활이나 입시 등에 대해서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손을 놓고 마음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내게는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 감정을 애써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딱 두 번, 해준이와의 관계가 저물어가던 끝자락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데 하루는 내가 대학에 합격했던 날, 하루는 졸업식이다.


10월 말 수능을 보기 전에 입학사정관제로 나는 서울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 수능최저등급이 없는 전형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친구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받았다. 그때 급식실에서 해준이를 마주쳤다.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내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해준이가 야속했고, 그래서 괜히 말을 붙였다. 돌이켜보면 해준이의 입장에서 당연히 느꼈을 불안함, 조급함, 나와의 관계에서의 배신감, 외로움 등을 그때의 난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그게,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어색하게 붙인 내 말 한 마디에 해준이는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고, 나 또한 얼굴이 벌게져서 짜증으로 맞받아쳤다. 모든 고등학교 생활이 마무리되는 졸업식날, 우리는 서로의 가족들 앞에서 어색하게 인사했고, 둘이 친하지 않았냐며 사진 한 장 찍으라는 어머님들의 열화에 아주 애매한 거리를 둔 채 사진을 찍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해준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꽤 시간이 흐른 뒤 해준이에게 먼저 메시지를 남겼던 적이 있다. 페이스북으로 어떻게 지내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2~3일 간격으로 오고 갔다. 그리고 용기내어 내가 보낸 “우리 한번 밥이라도 먹자.”라는 메시지창을 마지막으로 해준이는 더는 답을 하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독도고시원’에서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절 동안의 고마움과 이기적임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지만, ‘읽음 표시’ 이후 사라진 해준이에게 다시 한번 만나자고 말할 용기를 내진 못했다.


일방의 기억으로 쓰인 지난한 날에 대한 이 고백이 어쩌면 해준이에게 또 다른 나쁨을 저지르는 걸 수도 있겠지만, 한번은, 한번은, 그 아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주 솔직하게 나는 잘 되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고, 그때의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가기엔 우리가 공유했던 상처와 온기, 십 대의 비밀이 가지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안다. 이미 잊었을 수도, 다른 기억들로 덮어버렸을 수도, 아니면 해준이 너에겐 별일이 아니었을 수도, 혹은 선명한 방기 그 자체였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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