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연구원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활용하던 박사 연구원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러니 봐주라고 한다
꾸역꾸역 연구원에서의 일이다.
앙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박사 연구원과 같이 한 연구과제에 투입되었다. 해당 박사가 연구책임자라서 수시로 과제 관련 회의도 소집하고 점심식사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계약직 연구원으로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는 나는 업무적인 것은 물론 점심식사와 같은 업무 외적인 것까지 그 박사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업무 외적인 요구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하면서 메뉴를 정해달라고 한다. "돈까스는 어떠신가요"라고 하면 "음 그건 별로야."라고 하고 다른 메뉴를 천거해도 별로라고 거부한다. 이런 식으로 네다섯 번 메뉴를 거론한 후에나 겨우 그 박사의 마음에 드는 메뉴를 정할 수 있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는데 같이 일한다는 핑계로 나와 계속 식사를 하려던 이유 중 하나는, 같은 박사급끼리는 기피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안 좋아서 동료 박사들은 그 박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 같이 식사하자는 요청을 해도 돌려 거절하곤 했다. 나는 하급자라서 식사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박사의 타깃이 됐다.
본인의 육아 이야기, 남편이 바쁘다는 이야기 등등 동료 박사들이 들어주지 않는 본인의 개인 사생활 얘기를 점심시간에 늘어놓는다. 당시에 나는 내가 편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본인 이야기를 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같이 일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존중하지 않고 하대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시키는 것 이상으로 일을 해주면 고마워하기는 커녕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됐는데 성과평가를 한다는 사람이 논리 모형(logic model)도 몰라서 석사 연구원인 내가 만들어준 걸 그대로 보고서에 싣는 걸 보고 능력 미달임을 느꼈다.
다른 박사 연구원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이 사람과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일은 같이 해야 했으므로 철저히 업무적으로만 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같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같이 식사하자는 꼬임에 넘어가서 거리를 두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 같으면 천천히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경험이 일천하여 단박에 개인적인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만 하고 사담을 나누지 않았으며,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거나 혼자 식사할 예정이라고 에둘러 만남을 피했다. 업무 메신저로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하고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랬더니 이 박사, 며칠 만에 분노에 차올랐다.
나에게 업무 메신저로 연구과제 관련 회의를 단둘이 하자고 회의실로 오라고 지시했다. 상급자가 업무 지시를 위해 회의실로 오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서, 그리고 정말 업무를 위한 회의인 줄 알고 회의실에 웃음기 빠진 얼굴로 들어섰다.
앉아보라고 하더니 건네는 말, "요새 왜 그렇게 거슬리게 굴어요?"라고 하면서 본인이 서운했다는 말을 가득 찬 쓰레기통의 쓰레기를 쏟아내듯이 토해냈다. 나는 처음으로 남한테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서 꽤 충격을 받았다. "거슬리다"는 단어를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감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박사가 인성 개차반이라는 반증밖에 안 되는 워딩인데 말이다.
거슬린다는 말에 모든 판단이 정지돼서 나는 더 이상 그 박사를 상대할 인내심이 바닥났다. 혼자 고장 난 라디오처럼 징징대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그 박사를 두고 회의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내 자리로 갔다. 웃긴 건 그 박사는 자존심도 없이 나를 부르면서 복도를 쫓아왔다는 것이다.
역시 직장은 소문을 먼저 만드는 사람이 헤게모니를 잡는다. 그 박사는 "감히" 박사가 이야기하는데 석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가버렸다고, 본인은 억울하고 석사는 싸가지 없다는 언론플레이로 선빵 쳐버렸다. 나는 졸지에 버릇없는 연구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박사의 인성을 아는 다른 박사급 연구원 한 명이 위로랍시고 이렇게 말해줬다. "베이글 연구원이 좀 이해해줘요. 그 박사,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대."
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으면 성질부리고 부하직원한테 막대해도 되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팔도 안으로 굽는다고, 본인도 그 박사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같은 박사급 연구원이라고 나보고 이해하라고 나름 편을 들어주는 걸로 보여서 그런 변명을 해주는 사람도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박사는 나한테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몇 년 후 다른 석사급 연구원과 또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될 것처럼 붙어 다니더니, 그 석사급 연구원이 부담을 느껴 그 박사와의 관계를 손절하려고 하자 또 회의실로 연구원을 불러서 하소연을 하면서 이번에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밀접한 인간관계에 대한 갈구 때문에 직장에서 단짝을 만들려고 하면 안 되지 않을까? 어쨌든 직장은 친구를 사귀러 오는 곳이 아니잖는가.
그 박사는 툭하면 징징거리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신경질적인 사람이고 꾸역꾸역 연구원에 아직도 건재하게 재직 중이다. 지금도 직장에서 단짝을 만들고자 다음 타깃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