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예산 삭감
지난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있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 "나눠 먹기식, 갈라 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과학기술계에 큰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국가 R&D 예산이 일부 인사에 의해 좌우되며 특정 세력이 계속 연구비를 나눠 먹기 하는 소위 '연구비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었죠.
대통령 발언 이후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과학기술계는 딴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2024년 정부 연구개발 예산이 25조 9천억 원으로 올해 대비 16% 넘게 줄었습니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이 전년 대비 감소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단순히 연구비가 줄어든 것 이상의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삭감된 R&D 예산의 여파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올 해는 이미 책정된 예산으로 운용되고 있으니까요. 내년이 되면 삭감된 예산으로 인한 영향이 눈에 띌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올해 새겨진 상처로 인한 타격이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과학기술계를 바라보는 시선, 인식 변화와 그로 인한 인력 부족입니다. 내년 출연연구소 예산이 줄면 당장 비정규직인 포닥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대학원생들의 인건비 충당이 안 될 테니, 학생들의 진학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공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고용이 불안정한 곳'이 될 것입니다. 오래전 회자되던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는 말이 다시 회자되겠죠. 이공계 의대 쏠림 현상, 박사 인력의 교수 선호 현상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미 이공계에 발을 들인 인력들은 국내가 아닌 해외로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대통령의 발언처럼 나눠 먹기, 갈라 먹기 하던 연구자들은 있습니다. 아예 없을 수는 없죠. 그러나 30조 규모의 어디에서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예산 삭감에만 집중해서 2024년 정부 R&D 예산 안이 나왔습니다. 의사의 메스처럼 표적화된 칼이 아닌 마구 휘두른 무서운 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로 인해 연구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연구자들의 연구비는 줄고, 나눠 먹기와 갈라 먹기 하던 연구자들의 연구비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실제로 예산이 깎인 사업들을 살펴보면 나눠 먹기식 사업 운영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듭니다. 얼핏 생각하면 카르텔을 형성할 분들이라면 메인스트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실 것이니 이번에 큰 타격이 없을 듯싶습니다. 없애고자 했던 쭉정이만 그대로 남고, 알맹이는 떠나는 것이 아닐지 걱정입니다.
위 도표에서 내년 정부 R&D 예산은 2020년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연도로만 보면 4년 후퇴한 것이죠. 중기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현재 예산 수준으로 복기되는 시기는 2027년입니다. 4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연구인력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술계는 4년 이상의 후퇴에 해당하는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산 수준이 회복되는 4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2023. 8. 22.)
기획재정부,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 주요내용' (202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