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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rst Penguine Jan 07. 2024

재택근무자의 귀촌일기 1

벼락치기 공부처럼 귀촌을 결심하다

 나에게는 제주도 울릉도보다 먼 곳이었던 지리산 자락. 10년 가까이 전세계를 떠돌아 다니던 부산여자가 20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현재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살고 있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메인스트림을 동경하던 여자는 어쩌면 백기를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택근무로 전환된 지 벌써 이 년이다. 코로나가 터지고 전 지사가 재택근무에 돌입하면서 한국 지사에서의 내 고유 업무 영업이 대폭 축소되었다. 번아웃과 공황장애로 조금씩 병들어가던 나에게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팀, 그리고 재택근무의 기회가 주어졌다. 집안의 장손인 남편에게도 고난의 시기였다. 고향 구례에서 홀로 계신 시아버지는 여러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집안 송사까지 겹쳐 우리는 매주 구례를 다녀와야 했다. 

 우울증 극복 차원으로 서울 둘레길을 걷던 어느 토요일, 우연히 들어간 양재 귀농귀촌 관련 박람회에서 구례 부스를 만날 수 있었다. 구례에는 체류형 귀농귀촌지원센터라고 도시민들에게 10개월간 숙소와 텃밭을 제공하고 귀농귀촌에 필요한 모든 삶의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비용이 매달 16만 원 (지금은 물론 금액이 조금 인상되었을 것이다). 한번 구례 다녀오는 데 들어가는 기름과 톨비만 해도 그보다 훨씬 많이 들던 시기라 뭐 이런 개꿀 기회가 있냐며 바로 지원을 해버렸다. 최소의 짐만 꾸려 베란다가 딸린 구례 센터 내 원룸 숙소에 짐을 풀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 필요했던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센터의 숙소동 (좌). 전용 욕실과 베란다까지 갖춘 실평수 7평의 빌트인 원룸형 숙소(우).

 얼떨결에 시작한 구례에서의 10개월 간 귀촌 체험. 작년 봄 우리는 퇴소와 함께 새로운 귀촌집을 얻었다. 전업투자자였던 남편 T는 공식적으로 농부가 되었고 구례공공실내수영장에서 갈고닦은 솜씨로 생활체육대회에 나가서 수영 2관왕이 되었다. 물론 단독 출전, 예선이 곧 결선이었지만 말이다. 

 취미로 시작한 블로그에 끄적이기 시작한 나는 구례의 동네작가가 되었고 구례매천도서관 정지아 글쓰기 수업을 무료로 들으며 책도 한 권 낼 수 있었다. 물론 수강생들과 공동 저자이지만 정지아 작가님의 지도로 완성된,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다. 우리의 귀촌이야기는 EBS 한국기행에도 소개되었는데 다행히(?) 시청률이 높지 않아 아무도 못 알아본다. 구례의 천혜 자연을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나는 작년에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물론, 귀촌의 삶은 동화 속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촌 첫 해에 남편은 쯔쯔가무시에 걸려 응급실로 실려 갔다. 뉴스에서만 보던 진드기에 물렸는데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조기 은퇴용 주식계좌는 코로나시대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파란불바다이다. 양가 부모님들은 늙어 가고 그런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는 우리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 서울집 주택 대출을 다 갚으려면 아직도 10년이 더 필요하고 매물로 내놓은지 오래 되었지만 부동산 사장님의 연락은 없다.

 가끔 서울이 그립긴 하다. 내 친한 지인들과 동기들, 가족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 가끔 보고 싶은 유물과 미술전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만 열린다. 대기줄이 어마어마하다는 생크림 듬뿍 넣은 도넛 가게는 서울에만 있다. 눈물 나게 눈부신 한강의 석양과 시티팝을 bgm 삼아 달리던 노들섬이 그립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흩날리는 벚꽃을 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 수 없는 서울의 봄, 텃밭에서 갓 수확한 농작물로 아침 점심을 차리는 우리에겐 너무나 자극적인 서울의 먹거리, 출퇴근길 2호선 지옥철, 애매한 주차에 남겨둔 전화번호, 바뀐 명품 가방을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들, 우리 동네 재계발 재건축을 나보다 먼저 알고 알려 주는 지인, 정답이 아닌데 정답이라고 외치는 각종 소음들. 매순간 생존 모드였던 서울의 삶을 이제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귀촌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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