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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정 Sep 08. 2023

연결되지 않을 권리

#8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란 업무시간 외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근로자의 사생활 보호를 목적으로, 업무 외 시간이나 휴일에 전화, 메시지 등을 받지 않을 권리다. 최근에는 법규를 만들어서 처벌할 수 있게 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프랑스나 캐나다 등에서는 이미 법제화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미온적이기는 하나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작가가 되기 전에 나는 사교육 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교육 붐이 일었던 때였다. 특히 논술이 입시에 반영되면서, 내가 가르쳤던 논술 과목은 학부모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논술은 수학처럼 간단하고 명확하게 채점할 수 없는 과목이었다. 그래서 주말에도 문의나 상담 전화를 받곤 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학원에서 난리가 났다. 심지어 주말에 회식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람한테 질린 시기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직업을 완전히 버리고 싶었다.      


교사들이 죽고 있다. 나는 이 끔찍한 사태를 지켜보며 이건 학폭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교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은 학폭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연결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하고 선을 넘으면 처벌이 가능해야 한다. 나는 폭력에만큼은 남녀노소를 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그냥 인간 대 인간의 일이다. 어른이라고 아프지 않을까. 어른이라서 악질적인 폭력을 인내해야 할까.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두고 과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노사 합의로 해결한다? 그런 권리까지 법으로 보장해야 하느냐? 내 생각을 말하자면, 무조건 보장해야 한다. 당연히 권리로 인정받아야 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의 자율에 맡기는 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자율이었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처럼.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했더라면, 어쩌면 많은 교사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났을 때 어떤 연락도 받지 않을 권리. 왜 우리는 이토록 당연한 권리를 아직 갖지 못하는가.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교사들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 선생님들의 손에는 당당하게 몽둥이가 들려 있었고 우린 두려움에 떨었다. 맞아도 대들지 못했다. 부모님은 선생님 편을 들었다. 선생님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때려서라도 사람 만들자, 라는 대단한 철학이 아니라 그냥 화풀이나 습관으로 때리는 선생님이 많았다. 시계를 풀어놓고 귀싸대기를 날리기도 했고 대걸레를 분질러서 몽둥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울면서 복종했다.      


시대가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면서 놓친 문제들이 교사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교사가 되었는데, 학생에게 희롱당하고 학부모에게 갑질 당하다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택하는 귀한 생명들. 살려달라고 얼마나 많은 호소를 했을까. 나는 학부모가 교사에게 갑질하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차라리 내 어린 시절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폭력은 어느 시대건 부정당해야 마땅하지만, 선생님들이 산처럼 높고 거대하게 보였던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내가 피해자였던 그 시절이 나았다고 생각할까, 오죽하면.     


세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성장하는 쪽으로. 사회의 성장은 불균형에서 시작되면 곤란하다.  학생들의 인권이 중요해졌다면, 교사들에게도 권리가 주어졌어야 했다. 의무는 끝없이 강요되는데,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건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내몰리는 것과 같다. 싸울 무기가 없으면 도망치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맨몸으로 버티던 교사들의 힘이 다 빠진 모양이다. 이제 필요한 건 그들을 살게 할 무기를 주는 것.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반드시 법제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왜 못하고 있을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갑의 위치에 있지는 않은가.      


비단 교사뿐만이 아니다. 모든 근로자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칼퇴는 기본이고 퇴근 후에는 쉬게 해야지. 주말에는 가족과 보내게 해야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치사하지만, 또 가장 소중한 것이 밥줄이다. 그거 쥐고 흔들며 당연한 권리를 침해하는 고용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사람이 죽고 또 죽어야 겨우 들여다보는 근로 환경. 과연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전태일이 살아있던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모든 문화에 K를 갖다 붙이며 겉만 번지르르해진 나라가 부끄럽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보편화되면 많은 노동자를 살리게 될 거라 믿는다. 물론 그 권리에 불리한 조건이나 제약은 없어야 마땅하겠지. 타인이 주는 고통 때문에 죽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연결되지 않는 권리를 보장하는 나라가 되기를. 이제야 이런 글을 써서 너무 미안한, 살아남은 자의 애도.           


  



@ 이은정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 박노해 詩 「하늘」에서, 시집 『노동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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