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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들 Oct 22. 2022

고전에서 여성의 이름은 어디에 있나요.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여성

 고전 문학 작품을 수업하면서 아이들에게 편의를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교과서에 실린 작품 중에 글쓴이의 이름이 있다면 양반 남성인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예외인 경우는 '허난설헌', '황진이', '홍랑' 정도가 거의 끝이다. 이 중 둘은 기생이고, 한 명은 가부장제가 앗아간 문인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황진이'와 '홍랑'의 글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시조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잘라 사랑하는 임이 오신 날 붙이고 싶다, 버드나무에 잎이 나면 나처럼 여겨 달라는 여성의 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기다리는 여성의 모습뿐, 그들은 작은 한 줌의 애정을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허난설헌'의 글은 또 어떠한가? 남편은 기생집을 떠돌며 집에 오지 않고, 시집살이로 고생하 눈물로 연못을 만들 정도지만 끝끝내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따지면 교과서에서 허락한 여성의 이야기는 남성을 기다리는 소극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이 전부이다. 그 많은 여성 문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 사실상 여성 문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궁이에 불 때고, 밥 차리고, 농사일에, 바느질에 그들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존재했는가? 글을 쓸 수 있는 여성이 존재하는 사회였는가? 능력 있는 여성이 있어도 그들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작게 잘라지고 쪼개져서 집 안의 부품으로만 존재했다.


 그렇다. 고전 문학에서의 여성의 이름은 납작하게 눌려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학만이 남은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문학만 고른 것일까? 유려한 허난설헌의 글을 보면서 서글픔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뛰어난 재능이 담고 있는 쓸쓸함 때문이다.


 과거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다. 학생들 모두에게 '나'를 발견하고 더 나은 '나'를 알 수 있는 글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더 이상 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여성의 글만 수업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은 자신의 행복을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글도 읽어야 할 권리가 있다.


 미디어의 영향력도 크듯, 교과서가 주는 영향력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공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간에서의 글이,  독서의 전부인 학생도 적지 않다. 고전에서 글을 찾을 수 없다면 현대 문학의 다양한 여성의 글을 조금 더 실어주었으면 한다.


 좋은 여성 작가의 글이 이렇게 많은 시대가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요즘은 다양한 여성의 서사가 출판계에 숨 쉬고 있다. 모의고사에서 한 지문으로라도,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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