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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Jul 06. 2024

Broadway

Part 2. 편지-Off the Record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위키드를 봤어요 고모. 

고모와 블루스퀘어에서 위키드 내한 공연을 본 이후 거의 10년 만이네요. 

저희 영국 여행 갔을 때 오페라의 유령과 레 미제라블을 봤는데, 각각 전용 극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미국도 똑같아요. 위키드는 저희 숙소에서 5분 거리인 거쉰 극장에서 공연해요. 

저희에게는, 뭐랄까, 유명한 뮤지컬을 보러가는 날은 굉장히 특별한 날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뮤지컬을 보는 것이 마치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 같아요. 특히 옷차림에서 느껴져요. 저는 나름 뮤지컬 보러 온다고 코트와 원피스로 차려 입었는데, 사람들은 캐주얼하게 입고 왔더라고요. 


분위기도 훨씬 자유로운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공연장에서 절대로 음식을 섭취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잠실롯데야구장처럼 극장에서 음료수와 간식을 팔더라고요. 젤리나 감자칩을 손에 들고 있는 관객들이 많았고, 인터미션에는 화장실 줄보다 간식 부스 줄이 훨씬 길었어요. 

또한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이 기억에 남아요. 가수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국의 관객 매너는 정숙을 유지하는 것이잖아요. 반대로 미국에서는 침묵이 ‘무례’인 것 같더라고요. 관객들은 주인공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환호하고, 배우가 즉석으로 애드리브를 했을 때 웃고, 넘버에서 하이라이트가 나올 때 박수를 쳤어요. 

넘버가 끝나고 난 다음, 공연이 막을 내린 다음. 여태껏 무언가 완전히 ‘끝났을 때만’ 호응한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활기찬 분위기가 자아내는 현장감에 저도 동화되었어요. 극의 내용과 인물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한국 문화,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극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미국 문화, 각자 매력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은지 나쁜지 따지기보다는 둘 다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위키드가 다시 보였어요, 고모. 어렸을 때는 위키드의 상징색인 에메랄드빛과, 마법사 세계를 구현한 화려한 무대 장치, 글린다와 엘파바의 멋진 목소리에 매료되었죠.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지금 보니까 위키드는 상당히 어둡고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더라고요.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라는 이유로, 엘파바의 동생 네사로즈는 휠체어에 탔다는 이유로, 글리몬드 선생님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요. 오즈의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추악한 본성을 감춘 채 엘파바를 악인으로 선동하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해요. 

사회적 약자 차별, 허위 정보 확산, 선과 악의 이분법 프레임 조장, 낙인 찍기 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마 위키드에서는 글린다가 모리블을 감옥에 보내고 마법사를 끌어내리면서 어느 정도의 ‘정의 구현’이 나타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괜스레 씁쓸해지더라고요. 


서사 자체만 두고 봤을 때도 위키드의 스토리텔링은 참 훌륭한 것 같아요. 삼각관계 같은 치정을 다루는 대신 두 주인공의 우정과 성장에 집중하고,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 대신 짙은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기 때문이예요. 여태껏 브로드웨이에 열풍을 일으킨 ‘센세이셔널’한 작품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용두사미 결말, 불필요한 갈등, 자극적인 내용이 난무하는 요즘 콘텐츠에서, 이제 위키드는 콘텐츠 창작자가 참고해야 할 ‘좋은 이야기의 모범 사례’로 새롭게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위키드에 대해서 ‘할 말이 너무 많았던’ 스스로를 돌이키며, 그 어떤 것에 관해서든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는 태도가 중요함을 실감하게 됐어요. 깜빡 빠뜨리고, 잘못 이해했던 내용이 많으니까요. 앞으로는 어렸을 적에 고모와 함께 봤던 뮤지컬을 재관람하면서, 제 감상을 업데이트해볼까 합니다. 처음에 봤을 때랑 조금 더 나이가 든 다음에 봤을 때 작품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제게 늘 설명해주시는 고모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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