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인의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은 특정한 갈래로 귀속되기 어려운 작품이다.
먼저, 이 작품에는 아시아와 유럽 곳곳을 여행한 일화와 단상이 담겨있긴 하지만, ’ 여행기‘로 규정하기에는 그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모름지기 여행기라 하면 작가가 여행지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고, 여행을 통해 자신의 견문이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수려한 언어로 풀어내는 장르의 글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행에서 겪었던 부끄러움, 불편함, 슬픔의 설명과, 이러한 감정을 촉발한 장소, 사람, 사건의 재현에 사력을 다한다. 작가는 인도에서 정확한 길을 알려주려던 현지인을 사기꾼으로 착각하고 경계했다가 후회하기도 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험한 황망함과 참담함을 차마 글로 형상화할 수 없어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처럼 운명의 상대를 만났으나 여행 이후 연락이 소홀해지고 관계의 온도가 식어서 슬퍼하기도 한다. 방황하고 상처입기도 작가의 20대 시절이, 변수와 우연으로 가득한 작가의 다사다난한 여행기와 포개지면서 그 어떤 여행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우울한 명랑’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한편, 이 책을 안희연 시인의 첫 산문집으로 규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문집의 사전적 정의가 ‘리듬이나 운율에 구애받지 않고 형식이 없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쓴 글’이긴 하지만, 독자는 산문집이라 하면 일기면 일기, 수필이면 수필처럼 산문집에 통일된 형식을 기대하길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시인의 수필뿐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시, 여행 도중에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 짧은 묘사문이 규칙이나 범주 없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하나의 갈래에 귀속되는 글이기보다는, 안희연 시인의 20대 시절을 가장 날 것의 진솔한 ‘기록’인 것이다.
또한 이 기록을 안희연 시인의 다른 작품들과 같은 작품으로 묶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은, 안희연 시인의 출발선 혹은 원형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문학의 가치(사테의 살인적인 햇빛과 카뮈의 이방인) 시인의 역할(프라하의 존 래논 벽)유한한 삶이 가지는 애달픔과 아름다움(인도 강가에서 본 석양), 이별과 상실을 마주하는 태도(기차 창문으로 본 엄마와 딸의 이별)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것을 향한 남다른 애정(스라바스티), 사랑과 신뢰의 힘(네팔에서 면도하는 노인)등 안희연 시인이 다른 작품에서 집요하게 탐구하는 주제들이 이 작품에 수록된 다양한 기록들에 담겨 있다. 희망과 산뜻함보다는 애상감과 씁쓸함의 밀도가 더 높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당근밭 걷기> 등 시인의 대표작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대표작에서 구축된 작품세계가 태초에 어떻게 형성되고 움트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 글귀 모음
인간은 무언가를 붙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에게는 돈이나 명예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나 사랑일 것이다. 내게는 문학과 여행이었다. 문학과 여행이라는 목줄에 묶여 사정 없이 끌려다니느라 이십 대의 전부를 썼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홀로 캄캄했던 나는 여행을 통해 세상에 수많은 창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세상 어디에도 멈춰 있는 창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마다의 창문은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부표처럼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눈앞에 수천 평의 포도밭이, 노을 지는 해변이, 어둠을 쪼개는 햇빛이, 키스를 나누는 연인이 선물처럼 도착하곤 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정박해 있는 시간이 좋았다. 풍경이 주는 위로에 덜컹이면서 나의 삶도 누군가의 창밖으로 아름답게 흐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날들이었다. 내 이십 대의 창문에는 언제나 빗물이 흐르거나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그땐 눈앞으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까지도 슬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삶은 순서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세상은 해독 불가능한 암호로 가득했다. 삶은 이별의 연속이었다. 하루하루 너무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자신이 텅 빈 공기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행운에 다다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연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모든우연들을 헤아려보니 이 순간이 더 특별해졌다. 그가 건넨 한 장의 앨범은 모든 우연들의 총합이었다.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여행자의 일상은 아주 잠깐씩 반짝이고 대체로 고단하다는 것을. 수시로 결정을 내려야 하고 크고 작은 불편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를 찾아 헤매다보면 편한 집 놔두고 이게 뭔 고생인가 싶고, 갓 구운 빵도 한두번이지 국밥에 깍두기를 얹어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다가도 이런 행복, 여행자이기에 얻는 우연한 행복 앞에선 무장 해제가 되어 버린다. 자율추처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가는 일이 삶이라는 것을 긍정하디 된다. 여행이라는 우연의 도미노 놀이는 그래서 즐겁다.
각자의 궤도로 흩어진 우리는 언제 그랬냐 싶게 일상에 휩쓸렸고 무럭무럭 나이를 먹었어. 시간은 삶울 무서운 속도로 갉아먹었고 모든 아름다운 순간들이 아름다웠던 순간이 되어가느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란 슬프고 고단한 일이었지. 조금씩 너는 작아지고 작아졌어. 내 기억의 유리병에 담길 만큼. (중략) 어쩌면 나는 그 시절의 내가 한없이 그리운지도 모르겠어. 스물셋, 내 가장 찬란했던 시절, 너를 담은 유리병이 내 기억의 바다 위로 멀리멀리 떠가고 있어.
아이는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홀로 걷던 유년의 길들을. 아이에게 유일한 위로였던 노래와 책들을 아이는 쓰고 싶었다. 인간의 삶이란 극소량의 행복과 무한한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내면은 나선형의 동굴 같아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깊은 암흑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아이는 바라고 또 바랐다. 자신의 문장이 서늘한 비의를 품고 있기를. 명랑하게 날카롭고, 단순하게 깊어지기를.
인간의 감정은 액체와 같아서 쉴 새 없이 출렁여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출렁임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흘러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딱 그만큼의 양을 담아낼 그릇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윽고 그는 허탈하게 노트를 덮었고 짐을 꾸려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