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진지한 에세이가 아닌 가벼운 경험담임을 미리 밝힙니다)
OTT를 통해 미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주변에 나처럼 해외드라마를 좋아하는 친구가 많이 없고, 한국 포털이나 커뮤니티, 소셜 미디어에서도 역시 해외 드라마를 다룬 콘텐츠나 해외 드라마를 얘기하는 커뮤니티가 많이 없어서 아쉬움을 느꼈다. 나같이 이 해외 드라마에 '진심'인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그 드라마에 대하여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그 결과, 미국의 대형 웹사이트 겸 소셜미디어인 레딧 앱을 핸드폰에 다운받았다. 레딧에는 다양한 관심사에 따른 서브레딧(일종의 커뮤니티)이 많기로 유명한데, 그 중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서브레딧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즐겨보던 미국드라마 서브레딧을 구독한 후기, 구체적으로 어떤 게 흥미롭게 느껴졌는지를 여기서 간략히 적어보려고 한다.
1. 시작부터 센스 있는 네이밍
레딧 미드 서브레딧에 들어가면 해당 서브레딧의 전체 구독자 수와 현재 접속자 수를 알리는 문구가 가장 위에 뜬다. 하지만 ~members, ~ online이라는 표현으로 이 문구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서브레딧마다 드라마의 특성을 반영하여 구독자 수와 접속자 수를 공지한다. 예를 들어 미드 애봇 초등학교의 경우, 배경이 필리델피아 초등학교라는 것을 반영하여 구독자를 students(학생)으로, 접속자를 present(출석완료)로 표현한다 다른 예로 미드 가십걸의 경우, 어퍼이스트사이드 상류층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을 반영하여 구독자를 Upper east siders(어퍼이스트사이드 거주민), 접속자를 gossiping(가십 얘기 중)으로 표현한다. 스스로를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세계관 안에 있는 사람들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센스가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가 아닌 한드이지만 전세계 팬을 보유하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경우 역시 서브레딧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전체 구독자 수를 'eliminated'(게임에서 탈락한 사람들), 현재 접속자 수를 'still playing' (현재 게임의 생존자들)로 표현한다)
2. 체계적인 구성
서브레딧 안에는 다양한 하위 카테고리가 있고, 자신의 관심사에 따른 카테고리를 선택해 해당 콘텐츠를 선별해서 볼 수 있다. 서브레딧마다 하위 카테고리가 똑같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 아래와 같은 구성을 띈다.
Character Discussion-등장인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카테고리 (인물의 성격, 서사, 다른 인물과의 관계)
Season X-시즌이 몇 개 안되는 미드의 경우 시즌별로 내용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는 카테고리를 만든다
Episode Discussion-시즌이 너무 많은->한 5개 넘어가는 미드의 경우 아예 작품 내용에 관해 얘기하는 대범주 카테고리를 하나 만든다
Cast-드라마의 주조연역을 맡은 배우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카테고리다. 배우가 인터뷰에서 연기 소감을 밝히거나 시상식에서 드라마로 상을 탔을 때, 혹은 인스타에 출연진과의 촬영 비하인드/친목 사진을 올렸을 때 활발해진다
Press/Promotion/Production-드라마에 대한 보도자료/홍보자료/드라마 제작 과정 및 현장에 관한 이야기(때로는 일반인/파파라치에 의해 유출된 촬영 현장 사진&영상까지)를 다루는 카테고리. 주로 새 시즌 제작 확정/촬영 시기/공개 직전에 활발해진다.
Photo/Images-드라마 고화질 사진, 드라마에서 영상미가 좋았던 샷의 캡처본, 드라마에서 내용상 중요한 장면의 캡처본, 드라마에서 화제가 된 장면의 캡처본을 다양하게 올리는 카테고리.
Music-(배경음악이 좋은 드라마의 경우) 드라마의 삽입곡,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등에 대하여 얘기하는 카테고리. '이 에피소드 몇분 몇초/이 장면에서 나온 음악 제목이 뭔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Clothing/Styling-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패션, 메이크업, 스타일링을 분석하는 카테고리다. 사람들은 여기서 인물별 코디/착장이 멋졌던 순간의 사진을 모아 룩북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착장이 제일 멋졌는지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등장인물 중 단 한 명의 옷장만 가질 수 있다면 누구로 할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Meme-드라마에서 파생된 밈을 사진이나 움짤(gif), 바이럴된 릴스로 소개하는 카테고리. 코미디 장르 드라마(특히 시트콤)일 경우 이 카테고리의 게시물이 많다
Fan Art-이용자들이 자신이 직접 그린 팬아트를 올리는 카테고리.
Theory-해소되지 않은 의문, 복선에 대한 이용자 나름의 가설/추측글이 모여 있는 카테고리. 기묘한 이야기처럼, 주로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의 해외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카테고리다.
Book Discussion-우리나라에는 웹툰 원작인 드라마가 많다면 해외에서는 도서 원작의 드라마가 많은 편이다. 원작에 대한 분석 및 토론, 원작 내용이 드라마에 어떻게 반영되거나 각색될지에 대한 추측, 원작과 드라마 간 다른 설정 및 줄거리에 대한 비교 등이 주를 이룬다.
3. 참신한 콘텐츠
미드 서브레딧을 보면서 든 생각은 '팬들이 함께 정말 재밌게 잘 논다'였다. 어느 미드의 서브레딧에 가도 단골로 나오는 재밌는 콘텐츠가 있는데, 바로 투표를 통해 표를 채우는 것이다. 이 문장만 읽으면 무슨 말인지 싶겠지만, 실제 레딧 이용자들이 쓰는 템플릿 사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드라마 등장인물 중 '호불호 안 갈리는 모두의 최애'가 누구인지, '선인지 악인지 모호하지만 팬들한테 사랑받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비호감이었지만 나중에는 호감으로 바뀐 캐릭터'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는 존재감 없는 캐릭터'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용자들이 댓글창에 각자 적합한 후보를 얘기하고, 가장 언급수/투표에서의 득표수가 많은 캐릭터가 빈칸에 들어갈 인물로 선정된다. 사진으로 첨부한 3개의 템플릿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유형이고, 필요에 따라 팬들이 새로운 템플릿을 (가로축에는 배우 연기력, 세로축에는 캐릭터가 잘 만들어진 정도) (생존 가능성이 높은 캐릭터<->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캐릭터) 만들기도 한다. 완성된 표 한 장으로 드라마 팬들의 민심/팬덤의 지형도/드라마의 현주소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콘텐츠다. 덧붙여 이용자들이 프로듀스 101 국민 프로듀서에 버금가는 열정을 발휘하며 누가 가장 적합한 캐릭터인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밌다.
올해와 내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드라마(웬스데이 시즌 2,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시즌, 유포리아 시즌 3)의 잇따른 복귀가 확정됨에 따라, 해당 드라마 서브레딧도 평소보다 더 활기를 띠고 있다. 평소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미드가 있다면, 그 드라마의 서브레딧을 구경이 분명 재밌는 경험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