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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Feb 13. 2023

[NZ 13] 그들이 있었다

기억 혹은 추억(3)

[전 세계 고양이와 집사들을 만나보겠다고 혼자 떠난 세계여행은, <고양이를 여행하다>라는 매거진으로 발행해 하루 1개의 일기와 그림일기로 정리했다. 그 요약본은 <고양이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브런치북으로 발행했고. 마지막 나라인 뉴질랜드는 더 이상 고양이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두 번째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매거진으로 정리 중]




시작부터 짐도 잃어버리고 돈까지 넉넉하지 않았던 첫 번째 뉴질랜드 살이를,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기억을 하는 데는 좋은 사람들을 넉넉히 만났기 때문이다.


낯선 타국에서 우리가 언제 본 사이라고 살뜰한 애정을 가졌겠냐만은, 그랬기 때문에 앞 뒤 재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봐줬다.


학원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어학연수라는 개념이 낯설 때라 여자보다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3~6개월가량 연수를 오는 남자애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초급반에 있거나 좀 오래되었다면 중급반 정도에 있다 보니 처음 한 달간 나는 그들과 마주칠 기회도 없었고 따라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레벨 상관없이 몇 개의 반이 공동 수업(이라지만 게임 같은 걸 했다)을 하게 되었는데 통성명을 하고 나니 지금까지 그들이 나를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자마자 학원에서 제일 높은 레벨에 배치된 나를 보고 절대 한국인일리 없다고, 틀림없이 중국인일 거라고 자기네들끼리 결론을 냈다 했다. 실제로 내가 있던 반에는 나와 대만인 친구 하나를 빼면 모조리 유럽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여중, 여고를 나왔지만 학부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우리 과에 여자는 나 포함 달랑 8명뿐이었다. 그렇게 4년을 보냈으니 남자애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내가(은행이) 돈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우리 오늘 삼계탕 해 먹을 건데 올래?

-추석인데 다 같이 모여서 송편이나 사다 먹을까?

-우리 렌트해서 여행 갈건대 자리 하나가 비어, 갈래?


이런 식으로 3~4명이 함께 살고 있던 자신들의 숙소로 가끔 나를 초대하거나 근교 여행을 갈 때면 나를 불렀다. 그들의 이 제안 뒤에는 꼭 따라붙는 말이 있었다.  


-넌 설거지를 맡아


처음 그들의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얼마를 내면 좋을지 물었었다. 자기들끼리는 식재료든 여행 경비든 늘 1/n을 하기에 물었던 말이었는데 '몸으로 때우라(지금 같으면 성희롱으로 신고 들어갈 법한 말인데)'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은 느지막이 일어나 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게 다였는데 가끔, 혼자 밥 먹기 싫다며 같이 먹어주면 니 밥값은 내가 낸다, 하며 찾아오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너는 돈이 없으니깐'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 호의가 그 이유에서 출발했다는 건 뻔했다.


이렇게 함께 몰려다니던 우리는 오지랖도 태평양이었다. 한국인 학생 하나가 출입을 금지당한 시내의 한 Bar를 상대로 인종차별이라며 대자보를 준비했던 적도 있고(결국 학교 측의 중재로 잘 마무리되었다) 한국에서 사고를 치고 뉴질랜드로 쫓겨났던 중학생 남자아이를 살뜰히 품어준 적도 있다.


부모님과 형, 누나 모두가 의사 아니면 의대생이라는 집안에서 공부에 뜻이 없던 아이는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고 결국 경찰서를 들락거리다 유학이란 명목으로 이곳까지 쫓겨온 것이었다. 공식적인 가디언이 있었지만 아이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고 아마도 그래서 책임감을 좀 느꼈던 것 같다.




도착 후 한 달은 홈스테이를 했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학생들을 친 자식처럼 돌봐준 '사라' 아줌마의 집. 고집불통에다 목소리까지 커서 그 집을 거쳐간 일본인 학생들은 그녀를 '빠가(바보)'라고 불렀다는 걸 알았지만 나에겐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나타난 동양인 여자애가 그 추운 겨울, 망사 옷에 반바지를 입고 나타났으니. 눈이 동그래졌던 아줌마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사라가 학교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한 달의 홈스테이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나는 더 이상 연장은 못한 채 시내의 싼 숙소를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사라는 지금 수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자신의 차로 나를 데려간 곳은 오클랜드 대학교의 기숙사였다. 이곳은 대부분 학부생들이 이용하지만 몇 개 층은 일반인에게도 오픈을 했는데 숙박비가 말도 못 하게 저렴했다.


이렇다 보니 공실이 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고 나 역시 이미 몇 차례 도전했다 실패한 곳이었다. 내 얘기를 들었던 사라가 야금야금 연락을 했었나 보다. 그날 학교로 부랴부랴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공실이 났으니 당장 가서 계약하자고.


내가 떠나던 날 사라는, 프라이팬이며 숟가락과 포크며 혼자 밥 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주방용품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몇 년을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한 달을, 그것도 이제는 본인의 집을 나가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걸까.


나는 너무 많은 걸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만났던,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도 잊을 수가 없다. 알바를 하며 돌아가는 비행기값만 겨우겨우 마련했던 나는 정말 다음 날 공항까지 가는 버스비만 남은 상태였다. 떠나기 전 날 밤, 친구들을 몰고 와 기숙사 내 방에서 송별파티를 열어줬던 언니가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100달러 지폐를 건네주었다.


집에 돌아가면서 부모님 선물도 하나 없이 가는 건 아니야, 라며.


밤을 꼴딱 새운 우리는 다음 날 언니가 부른 승합 택시를 타고 함께 공항까지 몰려갔다. 그곳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이별을 한 건 당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 5년가량은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그 뒤로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매운맛 인생을 배우느라 연락도 끊어졌다.


나는 지난 25년간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고르라면 한결같이 대답했었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놀았던 뉴질랜드에서의 1년이라고.


많이 보고 싶네...


언제나 잊지 않고 나를 무리에 끼워줬던 고마운 친구들


여행에도 끼워주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잊지 않고 나를 초대해 주었던 사라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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