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성 찾아 나서기
IT업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라면 한번쯤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건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사용자를 고려하고 그들이 편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디자이너도 기획 역량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개발 지식도 어느정도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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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를 정의하는 말들과 기대하는 역량이 점차 많아져 어떤 흐름을 타고 가야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정말 이것들을 다 잘해야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디자이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과정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 일반적으로 IT 업계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대해 챗GPT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보았습니다.
1. 프로덕트 디자이너
비즈니스 측면을 고려하여 제품을 디자인합니다.
사용자 요구사항 분석, 시장 조사, 비즈니스 모델 개발 등 제품의 전략적인 측면을 담당합니다.
제품의 초기 아이디어에서부터 디자인, 런칭까지의 전 과정을 책임지며, 제품의 비전을 이끌어냅니다.
사용자의 니즈 및 고충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디자인하여 사용자들에게 가치를 제공합니다.
2. UXUI 디자이너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사용자 경험(UX)를 디자인하여 제품의 시각적 요소와 사용자의 경험을 개선합니다.
사용자의 편의성, 효율성, 만족도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수행합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와 비교했을 때, 주로 디자인에 집중하는 직무입니다.
비즈니스적인 측면보다는 UI/UX 개선에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사용자 이해, 비즈니스 측면 고려 등 익숙한 키워드가 많이 보입니다. 대다수가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설명은 실무에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모두 아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무는 현실이고, 여러 이해관계가 맞물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일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많은 디자이너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것부터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바로 디자이너와 PM(Product manager)의 직무 경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디자이너분들이 “이건 PM이 해야할 일 아닌가요?” 혹은 “PM이 이것까지 하시는데, 이건 제 업무 범위 아닌가요?”와 같은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다른 직무에 비해 유난히 PM과 디자이너의 업무가 겹치는 이유는 뭘까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세균무기’님의 ‘서비스 기획자 vs PM vs PO’라는 제목의 아티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당 아티클의 내용을 통해 정리해보자면, 스마트폰 보급 이후 서비스 기획자의 수요가 급증했고 동시에 업무 범위가 확대되며 더이상 기획자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존 서비스 기획자의 업무들이 조금씩 분담되거나 세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화면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일은 UX디자이너가 분담하고, Product managing에 집중하는 직무는 또 따로 두는 식으로요.
이런 식의 과도기를 거쳐오며, 기존 업무 방식을 유지하는 것과 세분화된 업무 방식을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역할의 상충이 일어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업 혹은 사람마다 해당 직무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기대하는 업무 방향성이 달랐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기준이 모두 달라 명확한 경계를 설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경을 살펴보니 결국 두 직무 사이의 모호함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 모호함을 해결해야한다면, 실무자들과 직접 조율하고 협의하거나 결정권자와 상의하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님이 출현한 유퀴즈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민희진님이 스스로의 일을 정의하는 말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스스로를 디렉터나 대표와 같이 직무 혹은 직책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는 일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디자이너이라는 직무명을 스스로에게 붙이기 앞서, 왜 디자인이 하고 싶었을까요. 각자의 사연과 꿈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나의 생각과 이상을 실현하고 싶어 디자이너를 꿈꿨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본질은 잊은채 디자이너라는 이름에 갇혀 우리의 역량을 한정 짓고 축소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다른 직무와 디자이너의의 일을 구분지으려는 노력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제 일을 다른 이의 일과 구분짓거나 ‘디자이너로서’ 해야할 일들은 나열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제 성장을 제한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개발자의 일, PM의 일을 모두 떠안고 해야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나의 역할에 갇혀 내 역량을 내가 좁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니콘 스타트업의 기술 블로그나 유명 디자이너의 책을 접하다보면, 디자인을 통해 성취해낸 성공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며 자극을 받기도 하고, 나도 이런 멋진 일을 해내고 싶다는 꿈에 부풀기도 합니다. 열정이 넘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신념을 갖고 실무에 뛰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곧, 실무에서 자신의 이상과 다른 디자인 포지션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디자인이 회사의 최우선 가치가 아님을 알면서도 막상 그 중요성이 지나치게 평가절하 당하는 느낌에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이 때 우연찮게 하경제 디자이너님이 링크드인에 올린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중요성에만 갇혀 더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본 이후 제 생각과 태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디자인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내 업의 가치를 낮게 보며 일하는 것도 프로답지 못한 자세라고 생각해요. 다만, 디자인’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업에 속한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통해 팀 혹은 기업의 목표 달성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기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 모여 우리 모두의 목표를 이뤄내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성입니다.
이 관점을 이해하자, 비로소 내 직무 가치에 대한 평가적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되, 조직원으로서의 나(혹은 나의 직무)를 과대평가하지 않고자 노력합니다. 결국 디자인은 더 큰 가치를 이뤄내는 여러 방법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이력서나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흔히들 채용 사이트의 기업 *JD를 잘 분석하라고 합니다. 채용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이를 분석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JD : Job Discription의 줄임말, 직무소개서)
간혹 JD에 나온 표면적인 것들에만 집중해, 이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기업에서 이런 역량을 지닌 사람을 왜 뽑기 원하는지 Why에 집중하기보다, 마치 체크리스트처럼 여기는 것이죠. 그러면서 “아 나는 이런거 해본적 없는데.. 이런건 나한테 해당 안되는데..” 생각하며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키워드로 ‘데이터’가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점차 데이터를 토대로 서비스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자이너 채용에 데이터 관련 역량을 적어놓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문제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를 보고, “우리 회사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일하지 않는데..” 혹은 “나는 데이터를 볼 줄 모르는데 큰일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도 한 때 데이터를 볼 줄 모르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습니다. 데이터를 보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데 당장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날, 제가 굉장히 편협한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업에서 ‘왜’ 데이터를 보는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한 것이었어요. 데이터는 결국 방법론입니다. 디자이너가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거나, 기업이 비즈니스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이죠. 즉, 단순히 데이터를 볼 줄 아는 능력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잘’ 개선하거가 비즈니스 목표를 ‘잘’ 달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수단은 말 그대로 나의 일을 원활하게 돕는 방법일 뿐입니다. 수단을 잘 활용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건 ‘본질적인’ 일을 잘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꽤 오래 작성했는데요. 디자이너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고민한지는 더 오래되었구요.
역설적이게도 이 글을 쓰면서 디자이너는 어떤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 어떤 일을 주로 해야한다거나 하는 식의 ‘정답 만들기’를 멈추었습니다. 동시에 세상이 원하는 모든 역량을 갖춰야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려고 합니다.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도 잘 해야하고, 기획 역량도 있어야 하며, 개발 지식도 어느 정도 필요하고 데이터도 잘 봐야한다..’
뭐 하나 틀린 얘기는 없습니다. 갖추고 있으면 좋은 역량들이죠. 하지만 이것들도 결국 일에 대한 ‘본질’을 대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의 강점을 아는 것, 그리고 나의 일로 어떤 가치를 만들고 목표를 이뤄낼 것인지에 집중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디자이너라면 갖춰야 할 ㅇㅇㅇ’ 같은 것들은 그 자체가 중요하기보다, 내 일에 속한 부수적인 것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때문에 모든 것을 흡수하기보다 내 일을 해내는데 있어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이에 맞춰 발전해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제 일의 가치를 두가지 관점에서 정의했습니다.
1. 직장인으로서 팀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2. 직업인으로서 좋은 경험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하다보면 가치관은 계속 바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두 가지 가치를 제 일의 중심으로 삼고자 합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디자이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모든 일에 정답이 없는 것을 머리로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단 사실을 이 글을 쓰며 깨달았습니다.
최근 제이슨 프라이드,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핸슨이 쓴 “일을 버려라”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성과를 내는데 있어 꼭 많이 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내용에 대한 책인데요. 아주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 일을 실제로 해보지 않았다면 그 방법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더욱이 최고의 실행 방법 중 많은 것들이 이미 전통에 속한다. 누구도 그 방법이 어디서부터 왜 시작되고 또 계속 행해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고의 실행 방법'이라는 강력한 이름표 때문 에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정말 최고인지 질문하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우리보다 훨씬 영리한 누가 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가? 그 방법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훌륭한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런가? 만약 그 방법을 따랐는데도 잘 안 됐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그런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이 분야에서 성공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어떤 기업의 법칙이 꼭 누구에게나 정답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 쓴 글의 내용도 분명 누군가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또 몇 년이 지나면 제게도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죠. 누군가의 성공담을 통해 여전히 깊은 감명은 받지만, 그것이 절대적 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세상에 정답’같이’ 들리는 이야기보다 현재 나 자신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정답은 없고, 나의 선택이 나를 이끌어간다고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