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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Sep 03. 2023

미친 마녀의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가져다 주세요.



또 한 명의 빌런 등장..

아니 이건 진짜 역대급 빌런의 등장이었다.

인생은 예상치도 못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 인생에서도 뜻하지 않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다거나 남들보다 잘나고 싶어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이번에도 지금처럼과 같이 무난하게 흘렀어야 했다. 기대했던 것도 없었다. 새로 맡는 업무는 그냥 조금만 좋은 환경이면 되었다.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할 거리도 없이 그 전보다 그냥 무조건 좋아지는 거라서, 그 조금만의 정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가져가세요.

가져다 주세요.



업무용 메신저로 그녀가 보내는 묘하게 기분 나쁜 이 말은 대체 어디가 잘못인걸까. 내가 이상한 건지 말이 이상한 건지 요가 이상한 건지.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누군가에게 ”가져가세요“라는 말을 써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 노란색 창고바구니들을 바닥에 늘어놓고서 그 안에 양말이니 속옷이니 손수건이니들을 잔뜩 담아놓고, 그 안쪽으로는 상표는 붙어있지만 지금은 그 가치가 없는 옷가지들이 산더미만큼 쌓아올려져 있고 그 위로 “오천원에 가져가세요” 라고 굵게 적혀 싸구려 전구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스케치북 한 장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길바닥 느낌.

(물론 떨이 옷을 파는 상인들은 요자를 붙임으로써 상품에 대한 주목을 유도하고 친근하게 관심을 주의 시킴으로써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어투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 미친 마녀의 “가져가세요”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회사인데 , 갑자기 내 배경이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로 장면이 바뀌어, 결재서류들은 꼭 콘크리트 길바닥에 내팽겨져 있고 당황스러운 내 표정이 남들에겐 들키진 않을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허리를 반으로 굽이고서야 주워갈 수 있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반말을 하거나, 악을 지르거나 왜 아직도 안가져갔죠?라는 식의 따져묻는 말투도 아니고 형식적으로 보면 진짜 서류를 가져가라, 필요한 기록을 가져오라고 말을 한 것 뿐이니, 늘 나는 이 나만 기분나쁜 듯한 애매모호함의 갑질의 경계에 서있다고 느꼈다. 물론 혹독한 사기업 문화를 겪은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의 어투때문에 내가 이렇게 치를 떠는 것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지만, 내가 있는 회사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보다 더 높은 사람도 그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이런 식으로 업무를 지시하지 않았고, 나도 이런 류의 감정은 처음이라 어려웠다.



내가 아직은 이 사회에서 아랫사람이라 그런걸까? 내가 속히 말해 누군가의 윗사람이 된다면 나의 말은 어떨까?

 


마주할때마다 기분이 다운되고 우울감이 계속 됐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 결국엔 내가 아닌지 계속 해서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걸 수도 있는데..) 내가 정말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 누군가의 윗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죽을때까지 타인에게 “가져가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가져가시면 됩니다” 라던지 “결재 되었으니 가져가 셔도 됩니다” 라던지 “필요할 때 가져가세요”라고 배려를 덧붙인다던지, 급한 결재라면 “이 건은 급해서, 가져가서 빨리 처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것 같다. 이런 내가 꼬장꼬장하고 답답해 보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또 고민해보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먼저 친절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한 장을 지나치다 무심코 받지 못하면 뒤돌아 괜히 신경쓰이는 게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속에서 만나는 그 누구와 어떤 모습으로 스쳐 지나가는 지가 쌓여 그것이 “나를 만들고 기억한다”고 본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 우울을 거둔다. 애니메이션 <코코>의 사후세계에서처럼 잊혀지지않고 결국 끝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건 나일거라고 생각하며, 사후세계에서도 내 인생에서도 미친 마녀가 하루빨리 지워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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