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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Sep 07. 2023

꽤 동글동글한 하루였다




평소와 같이 늘 일어나는 시간에 핸드폰 알람으로 눈을 떴다. 5분만.. 5분만.. 5분간 몇번을 미루다가 7시 40분 정도 되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시는 것으로 무수히 지난 아침들처럼 정신을 깨웠다. 어제 빨래 후 널어둔 하얀 치마랑 생각했던 남색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다행히 구김이 심하지 않아 한번에 선택됐다. 일분일초가 소중한 출근시간에 옷장 속에 넣을 때부터 그랬는지, 옷장 속에서 옷들이 서로 마구 끼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 .. 말하자면 지나간 어느 시점의 내가 게을렀을지 모르는, 잔뜩 구겨진 옷을 입은 거울 속 나를 보는 것 만큼 내 인생이 정돈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없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아침을 후회로 시작하지 않아서 좋았던 듯 하다.



사람들이 가을이 왔다고 했다가 다시 여름이 왔다고 했는데 아침에는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에 불었다. 너무 시원하고 상쾌해서 매일매일 불면 좋겠는 바람이었다. 이런 날씨에 손선풍기를 꺼내든 것이 머쓱해서 다시 가방에 담았고,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아파트 경비원이신지 초등학교 경비원이신지 모르겠는 중년의 어르신께서 늘 아침마다 인사를 해주시는데 그것이 언제나 고맙고 따듯하다. 나의 출근시간과 해맑은 초등학생들의 등교시간이 겹치는 것은 나의 하루 중 가장 큰 축복이다. 허리춤 만큼 작은 어린 아이들이 저멀리서부터 몰려 걷는 것만 봐도 귀여워 미소가 번지니, 아침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하루 비타민을 먹는다.



회사로 가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맺혀있는 땀이, 사무실 의자에 앉은 동시에 중력을 타고 이제 이마 앞으로 옆으로 주루룩 흐르기 시작한다. 아직 그래도 시원해질려면 멀었어. 몇월쯤 되야 땀이 안나려나. 오늘도 같은 생각으로 앞서 오는 계절을 기다리면서도 애써 가는 시간은 아쉬운 채로 업무를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땀은 선풍기 바람에 말라있다.



수요일 점심에는 발레수업에 가는데, 동료직원이 약속이 없으면 오늘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했다. 곧 떠나는 직원이라, 일정이 안맞을 줄 알았는데 가기 전 같이 점심을 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안가본 수제버거집을 소개시켜줘서 미소버거라는 시그니처 메뉴를 먹었다. 엄청 맛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며 거리를 좁히고, 일에 대한 얘기를 하며 속을 풀었다. 서로가 했던 실수들을 얘기하며 별일 없을 거라며 낄낄대며 서로를 위로했다. 주변으로 깔끔하게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어 그 사람들과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허투루함을 내세워 자신을 낮추는 시간이 좋았다.



성격급한 예민한 상사(?)는 오늘도 그랬는데, 오전에는 내가 실수한 것이 있어 후다닥 가지러 갔다. 다시 수정하면 되는 것뿐이라서 다시 하겠다고 말했더니 지금 이게 잘못 됐으니 B로 해달라고 여러가지를 나한테 얘기했는데, 다시 사무실에 왔더니 전화로 원래 하려고 했던 A로 하면 된다고 했다. 워낙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람이라 이제 그러려니 한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겠거니. 이런 생각이 드는건 어제 야근을 한 탓에 일을 많이 밀어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탓도 있다. 퇴근 무렵 쯤엔 지시한 어떤 게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날 때릴 거야 어쩔거야. 그 사람이 답답해 속이 뒤집히는 상상만으로 나는 왠지 모르게 기쁘다. 나도 또라이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 속상한 마음은 왜인지 줄어든다.



저녁밥 준비만으로 퇴근 해서도 잠시 쉴 틈이 없다. 시들시들해져가는 오이가 있어 며칠전 봤던 유튜브 레시피대로 오이를 얇게 조각내 소금에 절여 물기를 짠 뒤 역시 기름을 뺀 참치와 후리카케로 주먹밥을 만들었다. 밥이 되기 전에 양파, 애호박, 두부를 송송 썰어 된장찌개도 만들고, 된장찌개를 먹을 때 만큼 집밥을 먹는다는 마음이 드는 음식도 없다. 주먹밥이 생각했던 거보다 귀엽게 됐다. 동글동글 일정한 크기로 빚어졌는데 내 마음이 오늘 하루 모난 것이 없어 그랬을까 이것도 기분이 좋았다.



요리를 하며 유튜버 겨울서점님의 영상을 틀어놨는데 뜻밖에 너무 마음에 드는 문구들을 소개시켜줘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희망하는 것이 이미 뒤로 밀려났다는 점에서 미래가 이미 끝이 났고, 회상하는 것이 앞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과거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삶인 셈이다. 젊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늙을 수가 없고 이미 늙었기 때문에 젊을 수가 없다.>

- 왜 살아야하는가, 미카엘 하우스



요즘의 나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단지 날이 너무 더워서가 아니라, 눈 냄새를 맡는 길모어걸스의 로렐라이처럼 예쁜 코트와 장갑, 목도리를 두를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봄을 기다리고 또 그러다 봄이 오면 여름을 기다릴 것이다.



두 편의 단편만 남겨둔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마지막 두 편은 그 전만큼 좋지 않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한 편이 있었다. <흑설탕 캔디, 백수린>. 그런 인생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 챕터만라도 아주 마음에 꼭 드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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