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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꽃다리 Aug 28. 2023

[산숲 책숲]
나만의 향기 혹은 무기

[산숲 책숲]

나만의 향기 혹은 무기

 

이틀 만에 후텁지근한 공기를 뚫고 천마산에 닿았다. 버스로 임도 초입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4분. 사위가 캄캄했다. 다 내려온 사람 두엇과 마주쳐 올라가며 스마트 폰의 전등을 켰다. 숲에 가득한 비안개에 풍경이 가려져 동그랗게 앞만 보인다. 폭우 예보를 빗겨나 간간이, 조용하게 비가 와서 다행이다. 

비가 지나간 산 숲엔 하루살이와 모기들이 사라져서 좋다. 하지만 며칠 전 소슬한 바람이 불 때와는 달리 새소리들이 시끄럽다. 갑자기 가을이 오는가 싶게 소슬한 바람이 불던 며칠 전에는 영롱한 풀벌레 소리들이 숲에 가득 찼었다. 머잖아 또 그런 날들이 이어지겠지만, 새들도 후텁지근한 이상기후에는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는 모양이다. 목청 고운 새들이 어디에  그런 시끄러움을 지녔던가 싶게 새된 소리를 낸다. 새들의 새된 소리는 그네들 작은 몸 어딘가에 숨긴 보호막에서 흘러나오는 모종의 신호, 위기 상황을 전하는 신호인 듯하다. 

그러고보니 산 숲에 가득하던 꽃향기도 옅어졌다. 빗물에 향기까지 씻겨나간 것일까. 올 때마다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 나에게 폭 안겨오는 향기의 정체는 누리장나무이다. 타원형의 둥근 잎 위에 두리둥실, 하얀 수국처럼 모여 피는 아름다운 꽃나무는 그 모습과는 달리 누릿한 장 냄새가 난다하여 누리장나무란다. 그러나 냄새는 누군가 다가와 함부로 건드리는 잎에서만 내고, 꽃들은 온 숲을 덮고도 남을 만큼 깊고 풍성한 향기를 퍼뜨린다. 

향기가 선이고, 구린 냄새가 악이라면 한 몸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것이 이 꽃나무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악한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한 몸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졌다. 선함만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임을 창조주는 이미 아셨던 것이다. 누군가는 동네 산길에서 돌연 악한의 흉기에 찔리고, 어린 여교사는 출근을 하다 성폭행 당해 목숨을 잃는 위험한 세상. 어찌 부드럽고 고운 것만을 간직하라 이를 수 있겠는가. 누리장나무처럼 착한 이에게는 향기를, 까닭 없이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괴물에게는 악취로라도 대적함이 마땅하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지켜낼 자기만의 무기는 누구에게나 필수이다. 그것이 숲의 생명체들이 부르르 몸서리치며 물러서게 할 누리장나무의 구린내 같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말씀과 성령의 검’을 품기로 했다. 어두운 산길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내 영혼을 붙들고 계신 이 내밀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쉬지 않고 올라와 삼거리에 이르러 잠시 서서 호흡을 고른다. 전등을 끄니 희부윰하게 길의 실루엣이 보인다. 캄캄한 숲에서 뻗어 나와 있는 길, 내 발걸음을 인도해 집으로 가는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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