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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맥스 Mar 07. 2024

3화) 남자,51세에 딸 생일케이크를 만들다  

형 지천 말고 낙천을 해


나의 베이커리 시작은 지천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고장 난 어깨와 비문증과 노안으로 흐릿해지눈.

읽고 쓰는 것이 주로 하는 일인데 눈이 어두워지니 읽기도 어렵고,

어깨가 아프니 타이핑이 어렵다. 인풋과 아웃풋 모두가 막혀버린 신세가 됐다.

눈을 안 써도 되고, 오른손을 안 써도 되고, 머리를 안 써도 되는 일을 찾아서....

그곳이 홈베이킹이었다.


오늘 점심에 모처럼 후배를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마케팅으로 밥벌어먹고사는 형 같은 후배다.

카페에서 빵을 고르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새 지천명이 숙제다...

숙제하기 무서워서 그냥 베이킹하면서 소일하고 지낸다.

나도 이제 머리도 빠지고 안 보이고 어깨는 나가고 늙었어......




그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형, 지천명을 왜 해야 하는데?

우리 인생이 뭐 별거 아냐...

그냥 한 마리의 개미처럼 긴 우주에서 너른 자연에서 아무런 존재도 아냐.... 형

지천에 앞서 낙천이래.... 형은 너무 인생을 숙제하듯이 사는 거 같아...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천명을 알아야 한다는... 그런 스트레스가 형을 옥죄고...

그래서 없는 병이 생기는 거 같지 않아?

대충 살아 형... 지천이 아니라 낙천으로 ~~~~~~~~~


동생이 얘기를 하는 동안 속으로 나의 마음은 그랬다.

EnTJ인 내가 그 말에 쉽게 동의가 될 리가 없다.

알지 나도... 우리 인생 별거 없는 거... 자연의 한 티끌도 아닌 거...

물고기는 없다는 책에서도 주야장천 나오는 얘기잖아...

그런데 말이야... 네 말이 맞는데... 다 공감이 되는데... 지천하기 전에는 낙천하기 어려운 내 성격을 어쩌랴 ㅎㅎㅎ

그 말이 백번 맞다.... 지천이기전에 낙천이다...

그렇게 보면 밀가루는 나를 낙천으로 이끄는 천국의 가루다 ㅎㅎㅎ

빵이 익어가는 냄새가 퍼질 때만큼 좋은 순간이 없다.

반죽이 질지 않게 탁탁 접어질 때만큼 손에 좋은 감촉이 느껴질 때가 없다.

빵이 다 만들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책 한 권 쓴 거보다 더 큰 희열이 온다. 그 향, 온도, 색깔... 너무 좋다...


어젯밤에 만든 오트밀 요구르트 파운드다. 스콘은 아이 들 거. 요구르트 케이크는 내 거. 볼품없지만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개발자 마인드 말고 드리머의 마인드로 

 

나는 빵을 막 만들기로 했다. 그냥 막.


아무 빵이든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그냥 만들기로 했다.

언제 다 제대로 배워서 언제 내가 원하는 빵을 만들겠는가.

일전에 이런 조언을 들었다.

인생은 개발자 마인드로 살면 아무것도 못해.

알고리즘 맞추고 코드 짜고 테스트하고 다시 돌리고 버그 잡고 다시 돌리고...

그냥 드리머처럼 생각하고 원하는 거 있음 대충 그냥 해...

하다 보면 좋아하는 거 알 거고 좋아하면 계속할 거면 계속하면 잘하겠지 안 그래?

명언이다.

그냥 대충 하기로 했다.


오븐이 오자마자 나는 마구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일 일빵이라고 해야 할까?

가장 쉬운 파운드 케이크부터,

마들렌, 휘낭시에 그리고 여기에 밀가루와 우유를 더해서 머핀.

여기에 카카오를 더해서 초코 머핀.

초코머핀을 휘핑해서 컵케익.

물론 중간에 스콘이야 그냥 껌으로 만들었다.

제대로 잘 만들었냐고?

먹을만했다 심지어는 맛있었고 이뻤다 ㅎㅎㅎㅎ



마들렌은 만들기도 쉽고 먹기도 좋다.

반죽을 절반 남겨서 다음날은 우유 좀 더 넣어서 머핀을 만들기도 좋다.



마들렌 만들고 남은 반죽으로 만드는 초코머핀

카카오가루 좀 더했을 뿐인데 너무 맛있다.




모든 빵이 다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가장 망한 빵은 소금빵이다.

모양부터가 망했다. ㅎㅎㅎ

충분히 발효를 안 해서 소금떡이 됐다 ㅎㅎㅎㅎㅎㅎ



소금빵 반죽까지는 그럴싸했는데 말이다

2차 3차 발표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발효다. 반죽빵의 핵심은 발효고 인내다. 레슨 1




처음 만든 오트밀 요구르트 빵이다.

건강빵.

노 버터 노슈가 노밀크 노밀가루.

요구르트와 오트밀로 만드는 건강한 빵.

며칠째 점심 식사로 먹고 있다.





다른 형태의 스콘과 치즈스콘





예행연습으로 만든 초콜릿케이크


빵과 빵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가면서 날은 흘러

우리 집 둘째, 딸의 생일이 다가왔다.

파바 케이크 말고 내가 케이크 한번 만들어주리라.

바로 실행이다.

둘째가 좋아하는 초콜릿케이크로 연습 한번 해본다.

그럴듯하다.

초코로 아이싱을 올리니 나름 케이크와 같다 ㅎㅎㅎㅎㅎ





슈가파우더로 만든 하트는 못생겼다ㅎㅎㅎ


여하튼 예행연습은 이것으로 족하다

진짜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보자.



딸의 생일 케이크 ㅎㅎ


초콜릿케이크를 베이스로 위에 생크림을 올렸다

일단 흉내는 냈다.

딸이 고맙다고 했다.

고맙다고 말해주는 딸이 고마웠다.


고맙다 케이크

고맙다 베이킹

고맙다 오븐 초 밀가루 코코아파우더 계란 설탕 등등등

너희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호사를 누리겠는가

너희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낙천을 누리겠는가?

그래 지천보다 낙천이다.

낙천하다 보면 지천도 하겠지. 지천명을 알 때가 올지도 모르지.

베이킹 고맙다. 일단 이날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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