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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미스타 Aug 25. 2024

엄마의 인공위성

3월 2일


오늘은 발인이라고 했다. 나는 직접적으로 장례를 치러 본 것이 처음이었고, 남의 장례식에 가서도 발인이니 뭐니 할 때 별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3일째 되는 날 발인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모두 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아침에 간단하게 제사를 한 번 더 지내고는 정리를 시작했다. 장례식장 직원이 뚜껑이 없는 박스 몇 개를 갖다주더니 음식이나 비품 등 챙겨가실 것들을 다 담으라고 했다. 어차피 전부 돈을 낸 물품들이어서 챙겨가도 되는 것들이라고 했다. 


동생의 배우자 회사에서 보내준 일회용품과 이모네 회사에서 보내준 일회용품이 큰 박스로 두 개나 되었고 평소 엄마의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는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항상 나에게 '젖은 것은 먹던가 버리고 마른 것은 챙겨'라고 했다. 평소 먹지 않는 믹스커피까지도 살뜰하게 챙긴다고 챙겼는데 뭔가 조금 덜 챙겼는지 나중에 찾으니 없는 것도 있었다. 그나마 이모가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구석구석 다 남겨놓고 갈 뻔했다. 장례식장 주방에서 쓰던 식칼과 식가위, 서빙용 쟁반 등 정말 모든 것들을 다 잘 감싸서 다치지 않게끔 박스에 집어넣었다. 무엇이 되었든 엄마의 기운이 감돌았다고 생각하는 이 공간에 존재했던 것들은 모두 엄마의 흔적이라 생각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 싶었다.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지막까지 이모와 중간삼촌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었을 일이었다. 


발인이라고는 하는데, 나는 발인 때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일단 엄마가 살던 집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납골당(예전에, ‘봉안당’을 이르던 말.)으로 갈 거라고 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엄마는 내 차에 태워야 한다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해주었다. 만약 그 자리에 아들이 있었다면 또 너무 당연하게도 아들 차에 태워야 한다고 했겠지. 그보다도 아들이 있었다면 장례식장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아들이 없으니 큰삼촌이 완장 욕심을 내긴 했지만, 엄마가 그리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코로나에 걸려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괜찮은 일이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가려는데, 나는 길치이고 가뜩이나 생소한 길을 잘 알리 없기에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겠다고 했더니 큰삼촌이 역정을 내며(또는 비웃으며) 자기가 앞에 갈 테니 뒤에 따라오라고 했다. 원래는 엄마를 모시는 차가 제일 앞에 가야 하는데 운전자가 길을 몰라서 되겠냐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내비게이션도 아니고 처음 가보는 길을 어떻게 알아. 그냥 네비 켜고 가면 되는데 왜 길도 모르냐고 윽박을 지르는건데. 엄마 장례만 아니었으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갓집 식구 중에 내가 유일하게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엄마한테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준 가족이며, 장례식에도 일원 한 푼 도움 주지 않았지만 완장은 차고 싶어 했고, 남들 앞에서 조카 창피나 주면서 허세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만 따라오라고 하는 꼴을 보니, 정말 엄마가 아니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장례식 이후로는 얼굴을 보는 일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남매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 


결국 큰삼촌이 앞장을 서고 나는 그 뒤에 천천히 따라가게 되었다. 엄마가 살던 집 골목에 들어서서 잠시 차를 세우고 대문을 열어 마당 안으로 들어가 남동생 이름을 부르니, 남동생이 이제 막 일어난 듯 씻지도 않고 산발을 한 채로 억지로 비적비적 기어 나왔다. 오늘이 엄마 발인인 걸 뻔히 아는데,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대충 나와보는 동생을 보며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드가, 새끼야.' 하고 돌아 나왔다. 아빠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집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코로나를 옮아와 엄마를 죽게 만들어 놓고는 격리 기간에 밖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너무 소름이 끼쳤다. 그런 사람이었다. 


다시 각자 차에 타기 직전, 큰삼촌이 나에게 왜 이렇게 느리게 따라오냐고 뭐라고 했다. 나는 엄마 태우고 다닐 때 이렇게 다녔어. 엄마가 남동생 운전하는 거 무섭다고 했단 말이야. 그리고 삼촌 차에 딱 붙어서 가면 안 그래도 답답한 거 못 참는 엄마가 더 답답할 거 아냐. 남동생 운전은 큰삼촌에 비하면 양반이지, 훨씬 더 위험하게 운전을 하는데 그걸 내가 왜 따라 해야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삼촌이 뭐라고 지껄이건 내가 네비를 켜고 맨 앞에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울엄마는 내가 길치라서 네비 없으면 운전 못 하는 거 제일 잘 아는데. 내 차 제일 많이 탄 사람이 엄만데. 장례식장에서 큰소리 내기 싫어서 하자는 대로 했던 것이 정말 너무 후회가 됐다. 납골당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두 개의 함을 같이 넣을 수 있는 공간에 함이 하나만 들어있는 곳도 보였다. 


나: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면 두 칸짜리 넓은데 할 걸 그랬다. 엄마 답답한 거 싫어하는데...

언니: 나중에 아빠랑 같이 넣으라고 할까 봐 싫다. 

나: 하긴. 두 칸짜리 했으면 다들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절대 같이 안 둘 거야.

언니: 그래도 공간이 좁은 건 좀 아쉽긴 하다... 


엄마를 납골당에 모시고 집에 돌아갔을 때 너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느그 엄마 어느 병원에 있노? 내 이제 격리 해제됐는데 알아야 가보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된 거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모두 심신이 지쳐있었다. 격리 기간에도 밖에 잘만 돌아다니더니 이제와서 엄마 병원은 왜?


''코로나라고 입원해가지고 올 때 안됐나?''

''죽었어! 죽었다고!''


우리집에서 성격으로 따지면 가장 차분한 언니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언니도 그동안 참고 있었던 것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았고 그런 언니를 보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한때는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연민이 있었다. 그래서 아빠 때문에 엄마가 고생만 하고 살아온 걸 알면서도 엄마가 보지 않는 곳에서 용돈 몇만 원을 쥐여주기도 하고, 다들 말도 한마디 붙이기 싫어할 때 내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가며 살았다. 그렇게라도 하면 아빠한테 신경이라도 좀 덜 쓰고 그만큼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살아있을 때 이야기고, 엄마가 아니면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로는 우리에게 티끌만 한 의미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죽게 만든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한바탕 큰 소리가 나고는 다들 지쳐서 각자 쉴 곳을 찾아갔다. 우리 중 누구 하나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으나 모두가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장례식장에서 2박 3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슬퍼하지도 못했던 우리 세 자매는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이번 일을 치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나이만 먹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이런 관례를 알려줄 만한 어른은 우리 주변에 한 명도 없었다는 것과 우리 남매들도 역시 이런 것에 대처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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