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밭
49재를 지내고 창고 정리, 집 정리를 대충 끝낸 내가 대구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편함에 노란 4호 봉투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지난번에 같은 크기로 내용증명이 와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봉투를 꺼내 들었다. (예전의 내용증명은 사실 별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상속안내문'이라는 문서에 엄마 이름과 내 이름이 나란히 피상속인과 상속인에 적혀있었다.
아니, 나 방금까지 엄마집에 있다가 왔는데, 남편과 아들이 함께 살고 있는 엄마집에는 오지 않은 우편물이 나한테 왔다고?
아주 잠깐이지만 기대했다. 혹시나 엄마가 집은 남동생에게 주었지만, 집 옆에 붙어있는 이 자그마한 도라지밭은 나에게 우선권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도라지밭은 엄마랑 내가 제일 열심히 가꾸었으니까? 하지만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을 때, 상속인 전원에게 같은 우편물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집을 남동생에게 증여할 때 도라지밭도 같이 옮겨지는 줄 알았는데 따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엄마한테 기대했던 내가 여전히 바보 같았다. 엄마가 나만 특별하게 뭔가를 남겨주었을 리 없는데 혼자 무슨 상상을 한 건지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크게 웃어버렸다.
나는 확인한 내용을 가족 대화창에 말했고 집에 돌아가 자신에게도 온 우편물을 확인 한 언니가 도라지밭은 천천히 처리하자고 했다. 엄마 장례 이후로 언니도 무리하게 연차를 쓰고 있어서 당장 또 휴무를 내기 어려웠다. 남동생도 서류에 있는 번호로 전화해서 상속 절차를 물어보았다는데, 서류에 적혀있던 번호는 면사무소였고 절차에 대한 문의는 등기소나 군청에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흘러온 모든 상황이 우리 마음처럼 하루 이틀에 정리될 문제가 아니었고, 뭘 하든 가족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모두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기에 서둘러봐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다들 조금은 느긋해지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인가 지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우거진 도라지밭의 잡풀을 뽑으러 다녔던 나를 보고 도라지밭은 연송이 주라며 농담도 했지만, 결국 나는 제대로 살아볼 기회조차 없었던 엄마집과 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땅을 정리하는 것마저도 남동생의 일정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에 특별히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그 집에 살고 있는 것은 엄마가 선택한 엄마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왠지 남동생이 미덥지 않았던 나는 엄마집에 들르는 김에 남동생에게 신분증을 놓고 가면 그걸 들고 가서 내가 다시 한번 처리방식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원래 엄마집에 가는 길 그대로를 따라 운전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등기소가 눈에 띄었다. 나는 정말 혹시나 하고 등기소에 주차한 다음 내 신분증을 들고 등기소 안으로 들어가 상황 설명을 했다. 사실 담당자가 설명해 준 것이 모두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최종적으로 등기 반송료 2,100원을 내면 돌아가신 엄마 이름으로 되어 있는 도라지밭이 남동생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확인했고, 상속자 전원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바로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도라지밭 등기 이전을 마치고 남동생을 보자마자 또다시 상황 설명을 했다. 보험도 등기도 모든 것이 설명하고 확인할 것투성이였다.
남동생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제는 대놓고 아빠의 형제에게서 여러 가지 택배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기회에 그냥 당신 그 애틋한 형제들한테 가서 같이 살지 그래? 나는 화가 났지만 더 이상 말을 섞기조차 싫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눌러 내렸다.
우리는 평소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었고, 언니의 회사 동료 중에 신을 모시는 친구가 엄마가 좋은 데 가셨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모도 어디 가서 물어봤다고 하고 언니 동료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하니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니도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나 또한 평소에 믿지 않더라도 이번만은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