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과 정치적 갈등의 상관관계
오늘은 아이스커피 ㅎㅎ
경제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정치는 사회적 타협을 도출하는 큰 변수이다. 어떤 정책이든 정치적인 서포트가 필요하고 여러 상황들이 정치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변화한다. 정치는 여러 사회적 상황들에 대처하려 하기 때문에 경제학에서는 종종 정치를 아주 큰 내생변수 (endogenous variable)라고 한다.
때로는 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정치적 갈등을 야기한다. 이 글에서 나는 아주 큰 경제 시스템 중 하나인 무역이 왜 불가피하게 정치적 갈등과 포퓰리즘을 생성하는지에 대해 끄적여 보겠다. 그리고 왜 경제학자로써 이것에 대한 정답을 도출해 내기 어려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일단 옛날의 경제학자들이 왜 무역의 확장을 지지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독자분 중에는 자유무역에 대한 비판에 친숙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 비판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 더 디테일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역 이론의 변천사를 조금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론적 모델을 수학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구성 요소를 단순화하는 것이 유용하다. 그래서 초기의 무역 이론은 분석의 범위를 단 두 개의 국가로 보았다. 나라 A와 나라 B가 서로 다른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고, 그를 통해 무역으로 인한 이익을 두 나라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무역은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모두”라는 말은 나라 A와 나라 B가 모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경제학자들은 이 이론을 구체화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중 하나는 국가 내부의 사회 구성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X와 Y라는 산업이 있고, X와 Y가 요구하는 인재상이 다르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A는 X에 대한 인재가, B는 Y에 더 적합한 인재가 더 많다고 보자. (이 말은, 두 나라 간의 효율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두 나라 모두 무역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A라는 나라 속에서 X를 하는 사람들과 Y를 하는 사람 모두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에 자유 무역을 도입해 보자. 이제 A는 이제 효용성이 떨어지는 Y는 하지 않아도 된다. A의 관점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가장 경제적인 활동은 Y를 포기하고 X에 집중하는 것이다. X를 많이 팔아 Y를 싼 가격에 사면 되기 때문이다. 이 무역을 통해 사회 전반적인 GDP가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A라는 나라는 여전히 Y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오게 될까? Y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시대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이것은 불평등의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학적인 패러독스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GDP성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적 입장에서 불평등은 나쁜 결과이다.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시카고학파)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무역을 통해 A의 X가 부자가 되었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 A가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A, X)에서 (A, Y)로 부를 재분배하면 사회적으로 최적의 결과가 생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러한 쇼크가 중국이 WTO에 가입을 하고 무역을 늘려간 데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이 무역을 하게 되면서 서양 국가들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R&D와 매니지먼트에 집중을 하며 제조라는 어떻게 보면 그들의 강점이 아닌 산업은 중국에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서양 국가들의 국내 제조업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실질임금에 타격을 주었고 불평등을 야기했다.
미국에서 제조업을 하던 저임금 그룹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이 그룹을 사로잡을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했다.
좌파의 포퓰리즘은 버니 샌더와 AOC로 대표된다. 그들은 미국 국내의 (무역으로 인해 부자가 되었을) 사회 기득권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들은 부의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파의 포퓰리즘은 트럼프 대통령으로 대표된다. 트럼프는 이 그룹에게 모든 것은 중국과 이민자들의 영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그는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선언했다.
크게 보았을 때 두 그룹 모두 틀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추구하는 사회의 모습에서 차이가 보인다. 좌파의 관점에서는 재분배를 통한 타협을 원하지만 우파의 관점에서는 재분배보다는 무역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타협을 보려고 한다.
우리의 사회적 목표는 무엇일까? 최대의 성장일까? 재산 소유권의 타당성일까? 평등일까?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이 둘 중에 뭐가 더 맞는 방안인지는 굉장히 모호하고 측정이 불가능 한 문제이다. 경제적인 성장은 측정하기 쉽지만 평등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힘든 문제이고, 평등의 가치가 어느 정도의 성장을 희생할 정도가 될지도 딱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느 부분에서 이는 경제학의 한계이다. 경제학의 근간은 "제한된 재원으로 objective 를 극대화" 하는 것인데, 그 objective 를 알려면 정치와 철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나는 (1) 무역이 어떻게 성장과 불평등을 야기하고 (2) 이것이 어떠한 정치적 갈등을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3) 왜 경제학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기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했다. 경제학은 성장, 재산 소유의 타당성,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듣 두고 무엇이 더 타당하다는 답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무역, 성장, 불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매커니즘은 아주 경제학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그럼 이 "경제"라는 분석의 툴과 "정치"라는 가치 판단이 공존 하려면 어떠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할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리서치 결과에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Stolper-Samuelson theorem
Rodrik, Dani. "Why does globalization fuel populism? Economics, culture, and the rise of right-wing populism." Annual Review of Economics 13 (2021): 133-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