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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myungdan Dec 23. 2023

작가님이라 불렀더니 버스가 섰다

브런치 1인 송년회



정류장에 멈춰선 버스가 앞문을 열었다. 하차할 뒷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겠지 하며 기다리던 승객들이 버스가 슬슬 출발하자 기사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어어 하고 있었다.

함께 멀겋게 서 있던 내가 버스를 세웠다.




작가님!




버스 기사님을 작가님이라 불렀다.

승객들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이번엔 내게로 옮겨왔다.

작가님??

뒤이어 문 열어 달라는 소리가 이어졌다.

좌석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브런치의 글을 읽고 있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작년 한글날 첫글을 발행했으니 14개월 남짓 됐다.

하지만 나는 근 1년을 은거하는 사람처럼

지낸 꼴이었다.

일관되게 두문불출했다. 브런치 생리에 천지분간을 못하고 있던 터였고 관계에 적극적이지 못한 탓에 울타리의 경계를 내가 먼저 넘지는 못 했다.

지금처럼 띄엄띄엄 글만 발행했다.

그게 브런치에서의 내 처신이었다.




많은 작가님들이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갔다.

노크를 했지만 반응이 없자 그냥 가 버렸다.

내 글에 진심 머물렀다 가신 작가님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지나가는 바람에도 나는 꿋꿋했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브런치 생활의 변수가 되지는 않았다.

자신의 글을 알리고 한마음이 있음을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 당연한 일에 비켜서 있었고 동참을 하지 못 했다.

소통과 공감, 말할 필요도 없는 지혜의 금과옥조이나 그때의 나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에 더 기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걸 보는 사람이나 바람 뒤끝의 건조해지는 마음은 어쩌지 못 했을 것이다.  

팔랑 마음의 잎사귀 흔들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년 동안 구독자 5라는 숫자가 나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 5는 브런치 참여도의 지표 같은 것이었다.

브런치라는 종합 무대에 올라 한쪽 구석에서 혼자 마임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라봐 주지 않는 혼자의 몸짓이었다.

합의된 상식이 브런치에 있다면 나는 그 상식에 어긋났을 수 있고,

이상적인 브런치 활동에선 더더욱 실격일지 모른다.

팀이었다면 나는 아마 짤렸을지도 모르겠다.




5라는 성적표는 이걸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글에 대한 절박함이 없습니다.

당신은 브런치를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브런치 생활은 충실하지 못 합니다.

다른 작가들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브런치는 숲이 아닌가

방대한 숲이다.

1년이 지나고 나니 내가 이단아가 아님을 알게 됐다.

역시 브런치는 숲이었다.

선명하고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었다. 거칠 것 없는 글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홈화면 가리기, 댓글 허용 안 하기, 답글만 달기, 글만 발행하기, 자신의 대문 활짝 열어놓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오가기..

작가들은 브런치의 기능을 자유롭게 소비하며 자유의 모습과 포용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치관과 취향으로 나다움을 차별화하고 있었다.

다양성이 숲의 저력이었다.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며 브런치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확인하면서 다소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구독자 5와 우열을 가릴 작가는 없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작가는 보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을 품을 수밖에 없지만 공감 안에서 나눔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었다.




고유한 내가 중심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심이 아니라 고정된 말뚝이었다. 중심과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지

깊이 박은 부동의 말뚝으로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이게 다인가 싶었다.

자유로운 글쓰기에 익숙했던 터라 정기적 글쓰기도 굴레처럼 느껴졌다.

글쓰기 실력과 열정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브런치 이대로 좋은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깨달은 것은 관계 상호성을 추구했지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간 심리는 복잡하다.

돈키호테와 햄릿이 교차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햄릿형에 가깝다. 결정장애가 있다.

결정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결과와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라 했던가. 통감한다.

결국 나다운 선택을 하지만 때론 분별 있게 행동해야 한디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의 추진에 정신적 비용이 많이 든다. 생각을 속도감 있게 행동으로 풀어내지 못한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된다는 관계의 훈수도 있지만 브런치에서만큼은 적당한 거리란 어렵다. 공감과 교감을 위해서는 글과 하나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계속 쓰고 싶은가?

브런치가 고독한 시간과 공간이어도 괜찮은가?

내 글이 잠겨진 책상 서랍의 일기인가?

예스와 노로 체크하며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무의식적 프레임을 조금씩 걷어내야 했다.

어설프지만 자유의 갑옷을 한겹씩 벗으며 브런치로 걸어나갔다.





 '글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이 글이 변화의 다리가 돼 주었다.

삶의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공공연하게 언급하며 발행한 글.

그 글이 공허한 메아리로 남지 않으려면,

한없이 가벼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선 

물끄러미 붙박이로 있을 수 없었다.

내 발로 신을 신고 브런치 마을을 걸었다.

라이킷 해야 할 글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미처 댓글을 달지 못한 글들이 부지기수다.

눈이 간 글이 마음이 가고 마음 간 글이 또다른 기다림을 주었다. 어느 땐 그 기다림이 설렜다. 그러면서 작가님이란 말에 물이 올랐고 그것이 댓글이 되었다.




브런치 활동의 목표와 속사정은 저마다 다르다.

그 무엇이든 브런치 작가님들의 꿈과 뜻을 진심으로 응원할 뿐이다.




나의 브런치 활동은 장렬할 수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치열한 경연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들어설 수도 없다.

능력도 열정도 열망도 부족하다.

브런치 경험이 책 출간과 연결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나 그것이 내 글쓰기의 성패를 가르진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자유롭다.

모든 건 선택의 문제다. 그 선택은 진지하다.




앞으로도 본성의 자유와 고요함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좋은 독자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성과 감성에 섬세하게 감탄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울창한 글숲에서 사람냄새 맡고 나를 꾸짖고 격려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님을 부를 것이다.




"작가님~~!"




작가님이 뒤돌아보고 미소짓는다면

나는 나의 시를 읊겠다.






나도 숲이 되고 싶다






나도 숲이 되고 싶다

따로 또 같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고 싶다



서로가 숲이 되자고

열린 마음 맞대다 보면

흙먼지 날릴 일도

산기슭이 무너져

뿌리를 보일 일도

줄어들 텐데



숲이 되고 나면

나는 너의 산책로가 되고

너는 나의 쉼터가 되고

나는 너의 사색터가 되고

너는 나의 위로자가 되고

나는 너의 상담자가 되고

너는 나의 치유자가 되어

서로가 받쳐 주고 함께 커지는

오케스트라 같은 숲이 되겠지



하나로 끌어안은

강한 숲의 생명 앞에서

외로움은

마침내

숲에서 외로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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